중보기도



중보기도란 무엇인가?

 

1. 중보기도의 사건개요

 

최근 교계는 ‘중보기도’란 용어를 조심 없이 사용하며, 심지어 “중보기도 합시다. 중보기도에 동참합시다. 중보기도 학교, 중보기도 훈련 중보기도 팀 등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인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성도간의 서로를 위한 기도’ ‘남을 대신한 기도’ ‘성도가 함께 올리는 간절한 청원’등을 ‘중보기도’ 라는 개념으로 대체하여 별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다. 과연 그렇게 해도 되겠는가? 중보자가 누구인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중보기도 팀을 구성하는가 하면 타인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 사역으로 오해하는 교회가 점점 많아져서 이를 바르게 지도하기 위하여 중보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연구하게 된 것이다.

 

2. 중보의 언어학적 배경 및 용어

 

1) 언어학적 배경

 

영어성경에는 “mediation”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있지 않으나 희랍어 신약 성경 안에는 중보자(메시테스)라는 용어가 6회 사용되어 있고 이와 동일한 어원을 지닌 “헤메시투세” 가 하나님을 주어로 한번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양자 간을 중재하며 이로써 일종의 보증을 제시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중보자는 양자 간을 중재함으로써 양편의 대리자가 되며 또한 양자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정의가 실행될 수 있도록 이에 대한 보증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희랍어(헤메시투세)가 사용되어 있는 신약성경 안에는 화해의 의미가 한층더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효율성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한 층 더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학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이셨는데 이는 항상 “이질적인 것” “사이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 으로서 이 용어는 흔히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대한 의미에 있어서 대화의 통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중보라는 용어의 용례

 

중보라는 용어는 기독교에 있어서 전문적으로 사용되었다할지라도 그 의미가 극히 모호한 용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종교에는 필연적으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그리고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구분되어 있으며 다양한 존재의 범주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될 경우 여기에는 반드시 일종의 중보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이 중보의 개념이 종교적인 개념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수립하고 이를 유지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중보의 개념은 반드시 인간의 죄악성에 대한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서로 다른 두 양식 사이의 분리에 대한 개념을 한층 더 보편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불순종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호소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도 악한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일련의 계약들을 준수해야만 했으나 하나님의 모든 도우심에도 불구하고 결코 선을 행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자신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그 스스로 방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를 인간에게 보내심으로써 강구하셔야만 했다.

 

중보자나 중보의 뜻은 “사이에 들다” “중재하다” 라는 의미로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내려오시는 것은 납득이 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인간의 죄로 불가능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성경적인 용례로 중보자와 중보는 인간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활동의 필연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에서 중보자나 중보는 매우 특수한 의미를 지닌 연구의 대상이라 하겠다.

 

3. 중보란 무엇인가?

 

중보의 문자적인 개념을 살펴보면 먼저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중보하다(intercede)는 “사이로 들어가거나 통과하다” “서로 다투거나 사람들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당사자들 사이에서 활동하다” “중재하다” “조정하거나 중재하다” 의 조정을 의미한다. 조정한다(mediate) 라는 뜻은 아래와 같다.

 

1) 양극단 사이에서 양자 모두의 친구로서 당사자들을 중재하다.

2) 화해시킬 목적으로 적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협상하다.

3) 화평을 조정하다, 라는 중보의 뜻으로 나타난다.

 

즉 조정(mediation)을 정의하고 중보가 조정을 정의하고 있다. 이런 정의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중보의 개념은 조정하고 양자 사이에 들어가서 서로를 위해 변론하고 법적인 상황에서 상대방에 대해 한쪽을 대표하지만 그러나 한쪽에 국한되지는 않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중보의 히브리어 파가(paga)는 “만나다”라는 뜻이다.

 

시85;10 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라고 했다. 긍휼과 진리와 의와 화평의 하나님은 죄인에게 접촉될 수 없다. 죄를 멸하시는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만 죄인인 우리가 “의” 자체가 되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요 14;6 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한 말씀과

 

딤전2;5 에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라 하였다.

이로 보건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중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4. 중보기도란 무엇인가?

 

중보기도란 용어는 딤전2:1의 엔튜크시스(enteuxis)의 번역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하였다. 1993년에 출간된 ‘표준 새번역 성경’이 “…간구와 기도와 중보의 기도와 감사를…”이라고 번역하였다. ‘개역 성경’에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로, 1977년의 외경을 포함한 ‘공동 번역’도 “…간구와 기원과 간청과 감사의 기도…”라고 하였으며, 같은 동양권의 ‘중국성경공회’의 성경(聖經)은 이를 『…간구(懇求) 도고(禱告) 대구(代求) 축사(祝謝)…』로 번역하였으나 중보기도란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엔튜크시스’는 역본에 따라서 도고(禱告:개역), 간청(懇請: 공동), 대구(代求: 중국), 중보기도(仲保祈禱: 표준)로 번역되었다. 대개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청원 기도" 혹은 아브라함의 소돔을 위한 기도(창18:16-33)나 모세의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민14:10-19)처럼 “누구를 위한 청원”으로 풀이된다. 프라임(Derek Prime)은 이 용어에 대하여 “하늘에서 성도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간구하시는 중보기도”(롬8:34; 히7:27; 9:24; 13:15; 요일2:1)와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하시는 성령의 간구”에 사용되는 전용 술어라 하였다(롬8:26,27). 따라서 “…위한 기도, …대신한 기도, …와 함께 하는 기도” 등의 용어를 사용함이 좋을 것이다.

 

딤전2;1-2, 에 보면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한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를 섬기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는 기도의 네 가지 종류인데 그중 세 번째 도고, 라는 용어는 별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도고는 글자 그대로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말한다.

 

“중보기도의 능력” 이라는 책에 보면(p35) 중보기도에 관련된 용어로 첫째 합심을 말한다. 합심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고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을 중보기도, 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한 표현이 아니다. 사도행전 1장에 나타난 120명의 성도들이 합심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지, 이것을 중보기도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은 표현인 것 같다.

 

기독교 대백과 사전의 중보기도에 보면 전체 교회와 국가와 성직자와 귀족과 평민을 위해 중재하고 고인을 기리는 기도는 기도의 형태로 성공회 교회법 55조(1604년)는 설교에 앞서서 설교자들이 이 기도를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그 기원을 보면 고대의 전례에서 설교나 복음서 낭독 이후에 등장했던 흔히 연도 형태의 도고 중보기도에서 유례 하였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의 성 금요일 전례의 기도문과 일반 라틴 미사문의 독립된 오레무스에 잔존하여 있다. 9세기 경 사제는 일요일과 축일의 미사에서 설교 후에 모든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인을 추모하였다.

처음에 그것은 사제의 재량에 맡겨졌으나 점차적으로 일정한 형태를 펴 나갔다. 오늘날 중보기도는 대학교와 재판 설교와 국가 절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한국 교계에서 중보기도, 라 하여 많은 교회들이 사용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 성도의 ‘중보기도’는 기독교 교리 체계를 위협하는 용어이다.

 

1)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직과 중보기도를 손상시키고, 비성경적인 교리의 출현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속론적 의미로 사람에게 중보 혹은 중보자란 이름이 사용된 곳이 없다. 물론 중보기도란 말도 사용되지 않았다. 칼빈은 성도들이 올리는 ‘서로를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하시는 중보기도의 되울림”(시편20:2주석), 또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에 의존하고,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중보와 제사장직에 참여하는 기도”로 이해하였다(벧전2:9의 주석), 그리고 “그리스도는 구속의 중보자요, 신자들은 기도의 중보자”란 궤변을 철저히 경계하였다. 성도가 중보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중보직의 손상과 예수님의 고유한 중보기도를 왜곡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로마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중보기도’나 ‘성자들의 중보기도’와 연계되어 교리의 혼돈을 초래한다.

 

로마 카톨릭의 중보기도는 9세기에 활발하였다. “칼빈 당시에도 ‘성자의 숭배’나 ‘죽은 성자들의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가 유행하였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성자들의 중보기도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직의 영예 박탈과 중보직의 완전성 부인”이라고 비판하였다. 중보기도란 용어가 교회 안팎으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정통 장로교 총회의 결의나 성명서처럼 용어 사용이 불가함을 인식하고 다른 좋은 말로 대체하여 사용함이 옳을 것이다.

 

6. 중보기도는 카톨릭적, 성공회적 발상이다

 

원래 카톨릭에서 신부의 위치는 메디아 코트릭스(협동 중보자)이다. 죄인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게 막고, 앉아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중보자 역할을 가로채는 것이다. 고해성사가 바로 그것이다. 카톨릭 신도들은 하나님께 직접 죄의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대신 신부에게 고해하면 "네 죄를 사하노라" 그러면 신자들은 죄가 사해진다고 믿도록 가르친다. 따라서 기도도 하나님께 직접 하지 못하고 성인들의 이름으로 간접적으로 한다. 카톨릭 신도들은 죄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 직접 나가서 기도할 수 없다고 세뇌되고 그 결과 중간에 성인들을 통해서 한다. 물론 신부들도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대신 기도해 주는데 이런 것을 중보기도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직접 나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지성소의 휘장을 찢어주셨는데 이제 그들은 성도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성공회도 중간쯤 개혁한 교회라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매우 희미하다고 본다. 한국에서 개신교를 어지럽히는 이런 용어들을 남발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대천덕신부이다. 예수원이나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런 실수를 똑같이 범하고 있다. 그의 신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불신자, 혹은 다른 사람들의 중보자로 착각하면서 중보기도를 한다. 이는 전적으로 무지의 소산이고, 신학적으로 매우 잘못된 용어이다. 하루 속히 이런 잘못된 흐름을 막아야 하며 생각 없이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분들은 바른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7. 중보기도 용어는 비성경적이므로 사용을 중지해야 한다.

 

1) 예장 합동총회 신학부는 총회 산하교회에 중보기도’ 용어는 비성경적이므로 사용을 중지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예장합동총회 신학부(하구봉 목사)는 제4위원회(중보기도)를 열고 전국교회 에 이 용어의 사용을 중지하라는 공문을 발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공고문은 “성총회의 결의와 정신에 따라 총회 산하 각 지교회에서는 즉시 ‘중보기도’라는 용어의 사용을 중지하고 성경에 있는 대로 합심기도(마18:19), 도고의 기도(딤전2:1), 이웃을 위한 기도(살전5:25), 청원기도(골4:3)등으로 사 용해 주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하였다.

 

2) 예장 고려고신총회는 제55회 정기총회에서 ‘중보기도’ 용어사용 금지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고려총회는 성명서에서 “최근 한국 교계에 ‘중보기도’가 만연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사람이 사람을 위해 하는 중보기도는 불가능하며 오직 예수님에게만 사용될 수 있는 용어임”을 강조했다. 사용 불가 사유에 대해서는 성경말씀을 인용해 “중보 혹은 중보자는 유일무이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전용” 되며, “전 성경에서 구속론적 의미에서 사람에게 중보 혹은 중보자란 이름이 사용된 곳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종교개혁이후 개신교 특히 개혁주의 교회에서 사람이 중보기도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중보기도권이 사용됨은 중세의 로마카톨릭 교리가 부활함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고려총회는 대안 책으로 “성경에 입각해 ‘~대신 기도’, ‘~위하여 기도’, ‘~함께 기도’ 등의 용어를 사용할 것”을 덧붙였다. 

 

3) 통합측 한국장로신문에 중보기도에 대한 칼럼에 총회 용어 위원회 전문위원(숭실대교수)이 불가하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기독교 용어해설32> 2002. 7/6. p9 "중보"(仲保)의 사전적 뜻풀이는 "두 사람사이에서 일이 성사되도록 주선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고 죽은 일" 또한 "중보자"의 뜻 풀이는 "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 예수를 이른다"고 되어 있다.기독교서회편 "그리스도교 대 사전"에서도 "중보자"에 관하여 "결정적인 화해자로서의 중보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역할을 맡은 분이 하나님이며, 인간이신 그리스도이며 그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즉 유일회적인 희생제물이 됨으로써 영원한 화해가 이루어졌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로 주장하고 있는데 반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모마리아 역시 중보자라는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다." 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딤전2;5,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하여 예수님만이 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중보자라고 할 때는 위의 뜻풀이와 동일하게 , 또한 성경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예수님을 가리킨다. 또한 중보기도는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중보기도란 이처럼 예수님께만 해당하는 기도다. 다시 말하면 중보기도란 중보자(예수님)가 하는 기도란 뜻이며 중보자(예수님)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기도라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우리는 이 중보기도의 뜻을 확실히 알고 이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요즈음 교회 안에서 중보기도란 말을 사용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되는데 그 의미는 "이웃"을 위한 기도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이웃만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을 중보기도라 부르면서 중보기도모임, 중보기도회 같은 이름도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에서 중보자 예수님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하는 기도가 중보기도임을 분명히 안 이상 이웃을 위해서 예수님이 아닌 우리가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기도를 할 자격이 없다. 다만 예수님 이름으로 그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 이웃을, 때로는 특정한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이웃을 위한 기도"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우리가 감히 할 수도 없는 중보기도라는 말을 써야 하는가?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는 "주기도"라고 한다면 같은 맥락에서 중보자(예수님)가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을 우리는 중보기도라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우리들의 기도를 중보기도라 부르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4) 예장(개혁연합)총회의 헌법에 있는 대요리문답 제36~42문에 보면 예수님의 중보사역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도 우리 총회 산하 교회 안에도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훼손할 소지가 있는 중보기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 속히 시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8. 맺는 말

 

칼빈의 기독교 강요(김문제역,세종문화사,1977) p443 제12장-14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분과 성육신, 그리스도가 육신을 취하심, 중보자의 두 성품이 한 위격을 이룬다고 하였다. 제12장에 보면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직분을 다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어야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1). 중보자가 하나님과 동시에 인간이 되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시기 위해서 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려면 참 하나님도 되고 참 인간도 되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한 아무도 화평을 되찾기 위한 중보자 역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다(딤전 2:5)라고 하였다.

 

2). 중보자는 진정한 하나님과 진정한 인간이 되어야 할 이유로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시켜 줌으로서  인간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에게로, 지옥의 후사들을 하늘나라의 후사로 옮겨 주시기 때문이다.(요14;6) 3).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어야 할 이유로 중보자는 신성에다 인성을 결합하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한 편의 연약함을 죽음에 순복시켰고 또 다른 한편의 힘을 가지고 죽음과 겨루어서 우리를 위하여 승리를 획득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 중 어느 하나라도 박탈해 버리는 자들은 결국 그의 존엄과 영광을 훼손하고 그의 자혜(慈惠)를 몽롱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 기독론 p234에 보면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 시킬 중보의 자격은 성경에 명시한다고 되어있다. 중보의 자격에 대하여 살펴보면

 

1) 그는 반드시 사람이실 것이라 하였다.

 

그리스도가 천사의 성질을 취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인성을 취해 입으신 이유는 그가 우리 인류를 구속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갈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 그는 반드시 무죄하실 것이라 하였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일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벧전2;22-24,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3) 그는 반드시 신적 인격이실 것이다.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이러라.

 

요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위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한 것이요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거나 개인의 기도를 부탁받아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말 할 수는 없고 다만 “합심기도” “개인기도” “부탁기도” “청원기도” 라는 단어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에만 사용되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소위 요즈음 말하는 타인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 라 함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직 중보 사역을 약화시킬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타인을 위한 기도를 이웃을 위한 기도, 또는 남을 위한 기도라고 말함이 합당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내가 중보기도를 해 준다”라고 말을 하면 이 말은 마치 자기가 중보자라는 오해를 받기 쉬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중보자, 또는 중재 직을 약화 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중보기도 한다.”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신앙 상 좋을 것 같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시므로 예수님만 중보기도를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귀는 왜 모세의 시체를 놓고 다투었을가?


마귀는 왜 모세의 시체를 놓고 다투었을가?


모세의 시체를 놓고 미가엘 천사장과 마귀가 다툰 이유를 상고하기 전에 성경에 나타난 천사들을 먼저 살펴보자

가브리엘 천사(계시의 천사)

다니엘 8:16
내가 들은즉 을래강 두 언덕 사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있어 외쳐  이르되 가브리엘아 이 이상을 이 사람에게 깨닫게 하라.

다니엘 9:21-23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누가복음 1:19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스가랴)

누가복음 1:26-38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리에 가서(마리아에게)

미가엘 천사(수호의 천사)

다니엘 10:13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

요한계시록 12:7-8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가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사37;36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185,000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왕하19;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팔만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히스기야 왕  때의 사건)


왕하6;17 기도하여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루시엘 천사(사랑의 천사, 또는 찬양의 천사)


욥38;1-10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 천사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린 것으로 나타나 있다.


겔28;11-15...너는(루시엘) 지혜가 충만하며 아름다움이 완전하여 모든 것을 봉인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동산에덴에 있었더니...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이요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위에 있었고 불타는 돌들 한 가운데  오르 내렸도다. 네가 창조된 날로부터 네 길에서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 안에서 불법이 발견되었도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천사에게 불법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불법이란 죄를 말하는데 그 불법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찬양하던 루시엘 천사가 타락하여 루시퍼가 되었는데 이 루시퍼는 어떻게 하나님을 반역하여 마귀, 사단, 옛뱀이 되었을까?


사14;12-13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위에 좌정하리라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날의 심판 때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이 말씀들을 살펴 볼때 루시엘 천사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으로 하늘에서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루시엘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이 있었다. 이 교만이 잉태되자마자 루시엘은 자기 위치를 떠나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하여 루시퍼가 된 것이다.


딤전5;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 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천사들 중에도 선택받은 천사가 있는가 하면 선택받지 못한 천사 즉 타락한 천사도 있음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계12;7-9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가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쫒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쫒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쫒기니라.


루시퍼가 타락할 때 천사들 중 1/3은 같이 타락하였고 2/3의 천사들은 선택된 천사들이었다.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범죄한 천사들은 어두운 구덩이에 갇혀 있다.


벧후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하나님을 반역하여 타락한 루시퍼 즉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놓고 미가엘 천사장과 어떻게 다툴 수가 있을까? 도대체 모세는 무슨 죄가 있었기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마귀가 모세를 참소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서 미가엘 천사장은 단 한방의 칼에 쳐서 마귀를 멸하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세는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아니라는 말인가?


요일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유1;9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한  그 이유들을 성경에서 찾아보자!

 

민20;7-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 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


민20;11-13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더라.


민27;12-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자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의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신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라 이 물은 신광야 바데스의 므리바 물이라


시106;32-33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이 몇째 계명인가?


출20;7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아니하리라.


약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신3;27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신34;4-6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며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 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한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인가?
마귀는 모세를 정죄하면서 모세의 시체를 마귀가 가져가려했다.
모세의 죄에 대한 마귀의 참소는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미가엘 천사장이라 할지라도 마귀를 판결할 수 없었으므로 다만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디로 갔을까?


눅9;29-31까지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계실 때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모세가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같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 모세는 엘리야와 함께 천국에 들어간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보자


출32;32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모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삭제되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가 없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눅10;20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계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결론(結論)

1.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놓고 미가엘 천사장과 다툰 것은 개인적인 생각으로 볼 때 마귀는 모세의 시체를 묻은 무덤을 통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을(성도들을) 타락시키려는 전략인 듯 하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묘를 아무도 모르게 하신 것으로 판단된다.(신 34:6)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 무엇을 통해서라도 우상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신명기 34:6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2. 죄는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간에 마귀가 참소하는 대상이 되므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말씀이라 생각한다.


3.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는지 믿음으로 확인해 보아야할 것이다.


4.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가 흐려지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흐려지지 안도록 믿음생활 잘해야 할 것이다.(가롯유다의 이름과 모세의 이름 비교)


5.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려면 성령의 인침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갔으면 한다.   




레위기 강좌

레위기 1장에 관한 질문(02-04-2021, 목)

1.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신 곳은?

2.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3. 번제의 제물의 종류는?

4.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는?

레위기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5대 제사와 7대 절기

1. 번제
(燔祭) / 흠없는 제물은 곧 완전하고 아무 흠도 없으셨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2. 소제
(素祭) / 고운가루-예수님 인성이 완전히 가루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자아가 완전히 깨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받으신다. 깨어지지 않으면 하나되지 않는다.(갈2:20)

3. 화목제
(和睦祭) /

화목제의 특징
감사예물-기도응답,하나님의 구언과 축복에 감사
서원예물-하나님앞에 서원할때나 나실인같은 성별해제같은 서원이 끝났을때
자원예물-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와 헌신의 표시

화목제이신 예수그리스도
이 제사는 다섯가지 제사 중에서 맨 마지막에 드려진다.

롬 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엡 2:13-14“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갂워 졌느니라.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4. 속죄제
(贖罪祭) /


속죄제와 속건제의 현저한 차이 하나는 속건제는 반드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속죄제-하나님께 범죄/ 속건제-사람

5. 속건제
(贖愆祭) /

요한복음 12:20-25
왜 절기를 주셨는가?
첫째,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
둘째,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이 육체로 오신다)
셋째, 성도들에게 임할 복음의 사건

1. 유월절
(逾越節)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유월절 어린 양, 이렇게 죽으리라. 예수의 피로 구원

2. 무교절
(無酵節) / (무덤에 갇힌 예수) 무덤에 있으리라! 물질, 질병, 가정, 자녀, 사업, - 겉 사람을 처리하는 과정
(예)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야곱은 밧단 아람 21년,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70년,
무교절의 기간이 사람마다 다르다.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한번에 끝이 났다.

* 선악과하나님의 뜻(의지, 견해)을 따 먹음으로 인간의 의지가 독립(사탄이 붙는 것)


3. 초실절
(初實節) / 부활하시리라

4. 오순절
(五旬節) / 성령을 주시리라

5. 나팔절
(喇叭節) / 재림하시리라

6. 속죄절
(贖罪節) /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리라

7. 장막절
(帳幕節) / 천년왕국(새 하늘과 새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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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장에 대한 질문 / 소제 (02-14-2021, 주일) 

1. 소제로 바쳐지는 예물은?

2. 소제의 제물에 첨가하는 것들은?

3. 소제물의 남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4. 소제물에 넣지 말아야 하는 것들은?

5. 모든 소제물에 넣어야 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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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제사 7절기

1.주제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45)

거룩(깨끗하다) : 코세르, 186번, 27장이니까 한 장에 13번정도 나옴
거룩 :구별하다,분리하다 - 레 11장......쪽발,되새김질/ 비늘,지느러미/ 날개,뛰는것

2.구분
1-10 어떻게 하나님께 나갈 것인가?......5제사
11-27 어떻게 하나님앞에 살것인가?........7절기
예배와 생활/ 칭의 와 성화

예배(제사)
1)“여호와 앞에서”-예배와 생활이 여호와 앞에서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자
2)드림이다,(5,11,11등)롬12:1=열납(가인,아벨)......무게 중심이 하나님께 가야....은혜 듬뿍
3)피투성이 책
.
1.번제
1)제물은 소,양,염소,비둘기입니다.(친숙...나를 드림의 의미)
①제물의 차이는 경제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를 바칠 수 있는 형편은 소를 양 을 바칠 수 있는 형편은 양을 가난한 자는 비둘기(새끼)를 바치도록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입니다
②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소유한 것 가운데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300 데나리온이든,과부의 두 렙돈이든,어린아이의 오병이어든,모세의 마른 막대기든....
③흠없는 것이여야 합니다. 말라기때 흠있는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병든 것을 가지고 오다 하나님께 책망과 징계를 받는 것을 본다. 준비된 믿음과 정성이 담긴 하나님의 받으심직한 향기로운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사1장-헛된제물 가져오지마라-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암5:22번제나 소제를 드릴 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다림줄에서 어긋났다.

2)다른 제사와 차이점
①번제는 향기로운 냄세를 발하는 제사입니다.(9)(속죄제는 향기로운 냄세가 없습니다)
②번제는 제주가 열납되기 위한 제사입니다.(3,4)(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열납)
③번제는 생명 있는 제물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소제는 고운가루로 드림)
④번제는 제물 전체가 태워지는 제사입니다.(화목제는 부분적으로만 태웁니다)

3)번제의 특성
①번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입니다.(2,3)-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우선
②번제는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2,3)-예수님도 자신을 자원해서 드림
③번제는 안수가 있는 제사입니다.(4)-자기 죄를 고백함과 죄를 전가 시킴
④번제는 죽음과 피를 강조한 제사입니다.-죄는 죽음,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⑤번제는 각을 뜨야 됩니다.(6)-가죽을 벗긴다는 것은 위선,거짓,외식을 벗고,각을 뜬다
는 말은 먼저 뿔을 자름-교만을 자름, 다음 다리를 자름-세상 향하던 발을 자름.
⑥번제는 정강이와 내장을 강조한 제사입니다.-마음과 행위,내면과 외면을 씻어야 받음
⑦번제의 제물은 완전히 불살라 졌습니다(9)-완전히 바쳐짐(헌신)을 의미합니다.

4)번제로 드려진 흠없는 제물은 곧 완전하고 아무 흠도 없으셨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2.소제
1)소제의 특징
소제는 곡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입니다. 번제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는 구속의 관계를 보여주는 제사라면, 소제는 그리스도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신을 가르치고 있는 제사입니다. 번제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 어 주신 것이며 소제는 우리가 주를 위해 헌신 봉사하는 것이다. 번제 없이는 소제가 있을 수 없다.
2)소제의 4가지 재료
①고운가루-예수님 인성이 완전히 가루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자아가 완전히 깨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받으신다. 깨어지지 않으면 하나되지 않는다.(갈2:20)
②기름-고운가루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자아가 깨어질때 성령의 기름 부음은 함께합니다
③유향-기도의 삶과 이 땅에 향기를 발하는 삶을 나타냅니다.
④소금-언약을 붙잡고 살라는 것과(변차멀러), 이 땅에 맛을 내라는 것입니다.
3)소제의 금지 재료
①누룩-바리새인의 누룩(눅12:1), 사두개인의 누룩(마16:6), 헤롯의 누룩(막8:15)을 조심 하고 했다. 누룩은 죄와 잘못된 교훈을 가리킨다. 누룩은 확산이 빠르다. 진실한 섬김,누룩없는 순결한 봉사
②꿀-죄로의 유혹을 상징한다,우리 끌지만 망하게 하는 것-돈,명예,쾌락,이성,자기만족....
피의 제사와 함께 드림
예수님의 성품,예수님께 성령임재,예수님 생애의 향기,누룩(죄와 흠이 없으신 예수),꿀(

3.화목제
1)화목과 평화를 위한 제물
2)화목제의 특징
감사예물-기도응답,하나님의 구언과 축복에 감사
서원예물-하나님앞에 서원할때나 나실인같은 성별해제같은 서원이 끝났을때
자원예물-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와 헌신의 표시
3)화목제이신 예수그리스도
이 제사는 다섯가지 제사 중에서 맨 마지막에 드려진다. 롬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엡2:13-14“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갂워 졌느니라.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2)화목제의 제물
.새가드려지지 않았다
.제물의 성이 구별되지 않았다.
.제물은 부분적으로만 태웁니다.
3)제물의 분배
.제사장몫,-
.하나님몫-
.드리는자몫-
화목제물은 하나님몫과 사람의몫으로 나누는데 쌍방의 관계(화목)=롬3장
화목제가 끝나면 다 같이 잔치를 함


4.속죄제
1)속죄제의 4등급-제사장,이스라엘온회중,족장,평민-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2)깨달으면-13,14,23,-베드로 죄의 민감해야 성령충만
3)여호와 앞으로 끌어와(4)-죄문제는 십자가 밑으로,천로역정
4)피를
.휘장에 7번-창3장,출26장
.향단뿔에 바름-떡상은 아니다. 기도는 피가 있으야
.번제단 밑에
5)진밖에 태움-영문밖의 십자가
속죄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5.속건제
속죄제와 속건제의 현저한 차이 하나는 속건제는 반드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속죄제-하나님께 범죄/ 속건제-사람
개인적 범죄,부정한 것과 접촉했을때,해야할 것을 안한죄,성물에 대한 잘못,남의 물건을 두고 범한죄,부지중에 범한죄,약속 불이행
1)자복
2)보상
7절기
1.유월절
1)정월(아빕월) 십사일 저녁
2)고전5:7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출12장, 유월=passovr-넘어간다
바로(마귀),종노릇(죄종노릇),애굽(세상)에서 해방
출12:2“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BC/AD
3)맨 첫 절기-왜 피로 죄사함 받는 것이 신앙의 제일 우선 이니까?최고,최대절기
4)구원은 오직 이 길만이(요14:6,행4:12)=피로만 죄사함이 가능
5)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십자가)

2.무교절
1)이 달 15일부터 7일간 무교절
2)무교병을 먹음-누룩없는 떡(고전5:7-8)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
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떡으로하자
누룩은 죄를(괴악하고,악독한) 상징, 집에 누룩이 있으면 안됨, 파묻음=장사
3)예수그리스도의 장사지내심

3.초실절
1) 레 23:10,11-첫이삭을 드림의 절기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3:9-10)
2)고전15:23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부활의 첫 열매
3)초실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4.오순절,칠칠절,맥추절
1)레 23:15-17 추수하다,수확하다,벤다 의미
*애굽에서 나온지 50일째 시내산 도착=율법 수여절
*부활 후 (초실절후)50일째 되는 날
*신16:10“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사랑절기=성령의 열매,곡물밸때,포도열매,감람나무열매=조금남겨둠(객,고아,과부)
2)떡 두개를 구워 요제로 드림-유애인과 이방인 성령 세례로 교회 탄생
3)오순절 성령강림(행2장)=율법 수여절

위의 4절기는 봄 절기입니다.=교회시대
4개월“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롬11:25)
아래 3절기는 가을 절기입니다.


5.나팔절
1) 레23:23-25 모든 절기 가운데 가장 경이롭고 신나는 절기가 나팔절입니다.
나팔 소리가 갑자기 온 이스라엘을 진동-그럼 백성들이 성정향해 모여듬.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성도가 만나는 영광스러운 절기이다.
*희락의 날(민10:10)=주님 강림 하시니
*나팔은 속전으로 바친 은으로 만듬=죄사함을 선포,
*이스라엘 사람들은 7월1일 신년입니다.=우리나라 정월 1월1일에 해당
2)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
께 구름속으로 끌려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3)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소집하는 신호입니다.-축제
4)사단과 주의 군사들이 전쟁하는 신호입니다.-심판
5)예수 기리스도의 재림
6.속죄절
1) 레 23:27,28 7월 10일 속죄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라
2)아사셀염소-한마리는 번제단에 한 마리는 광야에(우리 죄가 도이 서에서 먼 것 같이)
3)이스라엘의 회복
국가적 속죄일
대제사장이 일년에 일차 지성소에 들어가는날

7.초막절,장막절=광야회상,수장절
1)레 23:33-35, 39, 7월15일 -22까지 7일간
안식하는 절기(39절)-더할 수 없이 기다려지는 좋은 절기입니다.
즐거워하는 절기(40절)
감사의 절기-수확의 대한
2)계21:1-4, 새하늘과 새 땅-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
3)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계16:15-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
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스라엘의 7대 절기

출애굽기 34:22절 말씀이 많은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데…
일단은 레위기 23장을 중심으로 7절기를 정리하시는 것이 좋을 듯…


1 . 유월절(레 23:4-5; 고전 5:7)
히브리어로는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굽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2. 무교절(레 23:6-8: 고전 5:7,8)
히브리어로는 맛차로.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3. 초실절(레 23:9-14: 고전 15:20)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4. 오순절(=칠칠절=맥추절) (레 23:15-21 : 행 2:1-47: 고전 12:13: 엡 2:11-22)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으로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5. 나팔절(레 23:23-25)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6. 속죄일(레 23:26-32; 히 9:25, 26)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7. 초막절(레 23:33-34)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  

이스라엘은 우리로 치면
11월 경 이른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보리를 심고 이듬해 4월에 비가 멈추게 됩니다. 이 때쯤 유월절로 지키게 됩니다.
유월절 그리고 일주일이 무교절 그 유월절에서 7일씩 7주간 되는 날이 77철 7*7 49 임으로 다음날이 오순절 입니다.
이것이 봄에 있는 절기 입니다.

4월에 비가 멈추면 11월까지는 황량한 날들이 이어지는데
이 날들 중에 추수를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날이 나팔절 추수가 끝나면 수장절 그 후에 기억하는 날이 초막절입니다.

이 날이 보리 추수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포도 등과 같은 10월경에 추수하는 것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어서 저도 항상 고민이 됩니다.

다만 앞의 4절기는 유월절로 시작되는 절기이고
뒤의 세절기는 추수와 관련된 것입니다.
기준일이 다르니 굳이 연결하려 하지 마시고
두 절기의 그룹을 구분해서 설명하시면 됩니다. 




초막절과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 #.1

6. 초막절(Sukkot)


초말절은 히브리어로 '수코트'(Sukkot)인데 7월15일부터 21일까지 지킨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절기를 지킨다. 초막절에 주목할 만한 일은 오두막 혹은 천막을 만드는 일로 가정에서 특히 어린이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 준다. 초막을 만드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레23:43) 초막은 대개 천으로 만들어지는데 널 판지로 바닥을 깔고 지붕에는 여러 가지 나뭇잎과 가지를 얹는다. 초막의 내부에는 가을에 열리는 여러 과일로 아름답게 장식하며 식탁과 의자 등을 설치하기도 한다. 지금도 종교인들은 물론 비종교인들을 포함한 많은 유대인 가족들이 초막을 짓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속죄일이 끝나자마자 초막 재료를 파는 가게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대부분이 아파트로 구성되어 있는 유대인 가족들에게 있어서 초막을 만드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대개는 옥상이나 집 주변 공터에 설치를 하지만 설치가 불가능한 가정은 회당에서 공동으로 초막을 짓고 장식하고 지내는 경우도 있다.  


1) 초막절의 의의


초막절은 7월15일부터 한 주간을 절기로 지키는 이스라엘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이다. 초막절의 의의는 그 명칭이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하여 그 뜻도 그 명칭 자체에 함축하는 대로의 뜻을 가지고 있다.


(1) 초막절


초막절이란 저들이 종려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버들을 취하여 집 뜰이나 지붕 위에나 들에 나가서 초막집을 짓고 7일 동안 지내는 것인데 이는 저들의 조상들이 광야유랑생활에서 경험했던 고통을 기념하려는 데서이다.(레23;33-44) 즉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 추수를 끝내고 창고는 모두 오곡백과로 가득 차 있는 오늘에 농사도 짓지 못하고 물이 없는 사막을 방황할 때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고 천막생활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 여호와의 은총을 몸소 체험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후에는 이 절기에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단 곁에 뿌리는 풍속이 생겼는데 이는 물이 없어 광야에서 죽게 되었을 때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 먹여주신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이 사실과 관련하여 자신이 참된 생명수가 되심을 설교하신바가 있다.(요7:1-39)


(2) 수장절


수장절은 저들이 전야의 농작물과 아울러 포도나 각종 실과를 다 거두어 드린 다음 감사를 드리며 기뻐하는 절기이다. 출23;16 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이룬 것을 년 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 함이니라 하였고 출34;22에는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하였다. 신16;13에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7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라고 하였다.


(3) 장막절


장막절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 온 이스라엘이 과거 광야 생활을 기억하고 또 현재의 축복에 감사하며 지키게 된다. 신명기 16:13에는 "너는 네 곡식과 네 포도주를 거둬들인 후, 칠 일 동안 장막절을 지킬지니라."고 되어 있다. 이 명절이 이스라엘의 풍요와 관계된 명절임을 알 수 있다. 장막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표 한다. 이스라엘은 천년왕국의 안식으로 들어갈 것(히 4:8-11)이고, 그들은 거기서 풍요를 누릴 것이다. 그때 그들은 민족들의 머리가 될 것이다. 특별히 시편 19:5에는 "태양을 위한 장막"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의의 태양(말 4: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장막절이 관련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마태복음 17장에서도 베드로는 산 위에서 변형되신 그리스도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타나신 것을 보고 장막(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했다.(마17;4) 그때 베드로는 자기가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인지 몰랐지만, 그 내용은 재림과 장막절의 연관성을 보여 주는 말이다. 왜냐하면 변형된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장막절은 천년왕국 기간에도 지켜질 명절인데, 이 명절은 이방인들도 지켜야 할 명절이다. 만일 장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오지 않는 민족이 있다면 그 땅에는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슥 14:18).


장막절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출애굽 이후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역사적 요소요,

둘째는 올리브와 포도 등을 추수하는 수장절을 지키는 농경적 요소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막절과 수장절은 같은 명절이다. 장막절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서 올리브와 포도를 거두어 보관하게 되고,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막 즉 텐트를 치고 생활했던 것을 기념하는 명절이다. 그래서 장막절을 수장절이라고도 하고 초막절이라고도 부른다.(출23:16, 34:22)


장막절에 두 가지 사항을 지킨다.

첫째는 일주일 동안 초막에 거주한다. 레위기의 명령에 따라 일주일 동안 초막에서 먹고 잔다. 유대 법에 의하면, 초막에서 먹는 것만 의무이고 자는 것은 의무가 아니지만, 대부분은 초막에서 자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혹 비가 오더라도 약한 비 정도는 참으며 식사를 하고, 장대비가 쏟아질 때에만 실내로 자리를 옮긴다.

둘째는 장막절이 시작되는 첫날에 ‘아름다운 과실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뭇가지와 갯버들을 꺾어 들고, 하나님 앞에서 이레 동안 절기를 즐겨라’ 하는 명령을 지킨다는 것이다.


(가) 이스라엘의 장막절


일곱째 달의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은 주에게 예배하는 초막절이다. 초막절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이날은 생업을 돕는 일을 아무도 해서는 안 된다. 이 절기들이 다가올 때마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번제물과 곡식제물과 각종 희생제물을 부어 드리는 제물을, 각각 그 해당되는 날에 주께 불에 살라 바치는 제사로 드려야 한다. 이것들은 모두, 주가 명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 외에 지켜야 할 것 들이다. 절기 때에 너희가 바치는 제물들은, 각종 제물과, 각종 맹세의 제물과, 자유로운 뜻에서 바치는 각종 제물 외에, 별도로 주에게 바치는 것이다. 밭에서 난 곡식을 다 거두고 난 다음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 절기로 지켜야 한다. 첫날에는 좋은 나무에서 딴 열매를 가져오고, 또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뭇가지와 갯버들을 꺾어 들고, 하나님 앞에서 이레 동안 절기를 즐겨야 한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이레 동안 초막에서 지내면서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을 초막에서 살게 한 것을 가르쳐 알게 해야 한다. 이스라엘에 유학 가서 오랫동안 살다 온 건국대학교 최명덕 교수는 “유대인들이 사는 아파트는 우리의 아파트와 모양이 다르다. 어느 층이든지 베란다가 바깥으로 나와 있어서 베란다에 누우면 하늘이 보인다. 그 이유는 바로 아파트에 사는 사람도 장막절에 그곳에다가 텐트를 치고 장막절을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라고 했다.

 

(나) 장막절의 배경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는 매일 희생제물을 다 바치고 나면 으레 포도주를 제단에 부어 ‘헌주’를 하였다. 그러나 장막절에는 포도주 대신 물을 제단에 부어 바쳤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이는 비를 기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아마도 장막절이 지나고 나면 밀, 보리의 파종기 즉 씨 뿌리는 계절이 다가오기 때문에 적당한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아무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제단에 물을 부어 바치는 ‘헌수’라는 특별한 예식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히브리어로 “심핫 벳 하쇼에바”로 물 긷는 곳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제사장은 금으로 만든 물 단지를 들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물을 길었다. 돌아오는 길에 성전의 수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 뜰에 들어서면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제사장을 맞았다. 이때 다른 제사장들은 은 나팔을 불었고, 또 다른 제사장들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인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하고 하나님께 찬양했다. 이때 또 다른 제사장들은 긴 버드나무 가지들의 끝을 가지런히 하여 제단 쪽으로 향하게 올려놓았다. 물을 길어온 제사장은 물이 가득 든 금으로 만든 물 항아리를 들고 앞으로 나가 제단 위에 붓는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다시 은 나팔을 세 번 불고, 다른 제사장들은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제단 주위에 둥글게 서고, 레위 인들은 성가대석에서 시편 118편으로 찬양한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여, 구 하옵나니 이제 구원 하소서” 라고 외치면 모든 회중은 종려나무 가지를 높이 들어 빙빙 돌리며, 레위인의 찬양에 가담하여 함께 부른 후 유대인들이 중요시하는 마지막 축도를 다음과 같이 한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형통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도다. 주님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노라.”(시편 118:25-26)


“구원 하소서” 의 히브리어로는 “호사나” 이다. 이것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장막절의 마지막 날을 ‘호사나 라바’ 라 불러 ‘큰 구원의 날’ 로 지켰다. 유대인들은 이 날이 지난해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마지막 사죄의 날이요, 기쁨의 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제단에 물을 부어 바치며 유대인들은 나팔을 불고 찬양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춤을 추었다. 그들은 사죄의 기쁨과 구원의 감사를 표현하면서 성령에 사로잡히기를 원하며 황홀경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계시문학에 보면 메시아의 다시 오심이 장막절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스가랴 선지자는 새 시대가 도래 하면 이방나라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장막절을 축하할 것이고, 예루살렘에 와서 장막절에 참여하지 않는 나라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슥14:17-19, 이 세상의 어느 백성이라도,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께 경배하지 않으면, 그들의 땅에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집트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어울리지 않으면, 그들의 땅에도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은 이방 나라들에게 내리실, 그 똑같은 재앙을 그들에게도 내리실 것이다. 이것은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은 이집트 사람과 모든 이방 민족이 받을 벌이다.


 (다) 큰 구원의 날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 은 바로 장막절 마지막 날인 ‘호사나 라바’(큰 구원의 날)이다. 세계 각처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은 제단에 물을 부어 바치면서 사죄의 은총에 감사하고, 성령에 사로잡히기를 간구하고 찬송하며 춤을 추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리라”(요7;37-38) 하고 선포하신 것이다. 이 말씀에서 ‘그’ 는 바로 ‘예수님 자신’ 을 말한다. 즉 예수님 자신이 생수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장막절 마지막 날, 제사장들이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물을 일곱 번 붓는 예식을 통해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물이 자기들의 생명의 근원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가 바로 생수의 원천이고, 내 속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라고 선포하신 후 이제 와서 마시라고 초대하셨다. 이 초대는 구원의 부름이요,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와 예수를 믿는 자마다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제 때가 되면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나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주가 약속의 성령을 보내주시면 그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장막절에 대한 영적 교훈이다.





초막절과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 #. 2

2)  초막절을 지키는 의미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초막을 지었다고 해서 장막절이라고 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을 추수를 마치고 곡식들을 곡간에 들이고 지킨다고 하여 수장절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초막절의 진정한 영적의미는 광야에서의 과거적 의미가 아니라 장차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도들과 천국에서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을 담는데 있다. 초막절이나, 장막절이나, 수장절 모두가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축제의 절기이며 잔치하는 기분으로 지켰다. 초막절이 되면 온 민족이 환호성을 지르며 나팔을 불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과 얻어진 수확물로 인하여 풍성하고도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절기라서 최고의 축제로 즐겼다.


유대인의 절기들이 예수님과의 어떤 관계를 갖는지 한 번 정리해 보면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계시하는 절기였고,

무교절은 예수님의 무덤에 계신 것을 계시하신 절기였으며,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계시하는 절기였다.

여기까지는 봄에 지켜지는 절기로 이는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셔서 자기 몸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계시하고 있다.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하는 맥추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50일 만에 약속을 이루신 성령강림을 계시하는 절기이다.

성령강림 후 절기는 아니지만 넉 달 농사 기간 동안은 아무런 절기가 없이 지내는데 이는 성령의 강림으로 온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찾는 구원의 농사 복음전파의 기간이기도 하다. 넉 달 농사가 지나면 가을 절기가 시작된다. 가을 절기는 추수하는 절기로서 예수님의 심판을 담고 있다.

나팔절은 예수님께서 장차 하늘로부터 나팔과 천사장의 호령으로 재림하실 것을 계시하는 절기이다. 초막절은 예수님께서 성도의 처소를 예비하여 천국에서 신랑과 신부로서 거하게 되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절기로 볼 수 있다.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은 육적인 농사를 추수하여 곡간에 수장하였지만, 예수님은 성도를 구원하는 농사를 다 짓고 하늘나라 곡간인 천국 창고에 들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육적 농사는 성도들의 구원을 보여주는 영적 농사의 예표이다. 이 예표를 통해서 장차 주어질 천국을 깨닫게 하고 사모하게 한다. 그래서 초막절이 되면 온 이스라엘은 광야로 나가 초막을 짓고 거한다.


레23:40-42,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7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너희는 7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해 수확한 각종 열매와 곡식, 포도, 기름 등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지낸다. 절기의 7일 동안 매일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데 절기 중에서 초막절에 가장 많은 제물을 바친다. 이는 구원 받은 성도가 자기가 받은 면류관까지 다 바치는 것과 같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 성도가 얻은 모든 것을 다 예수님께 돌려 드리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광야로 나가 종려나무가지와 버드나무가지로 초막을 짓는다. 초막 속에 7일 동안거하면서 부모는 자식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여 광야를 어떻게 지나게 해 주셨는지를 가르쳐 준다. 이는 광야를 이스라엘 혼자서 지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기억하게 하고 그 때를 추억하면서 기념하고자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40년 동안 지나오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더위를 피하게 해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를 피하게 해 주신 것을 초막에 거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이다. 결국 일주일간의 초막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심을 상징화 하는 것이다. 이는 장차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하늘의 장막으로 불러들이는 것과 같다.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1) 초막절은 과거적 사건으로서는 출애굽에서 가나안 까지 사십년 광야 생활을 추억하게 하는  것이다


(2) 초막절의 미래적 사건으로서는 장차 도래할 천국을 미리 앞당겨서 맛보게 하는데 의미가 있다. 신앙생활은 미래에 주어질 것을 미리 맛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바울이 장차 들어갈 삼층 천을 미리 맛보고 살아간 것과 같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다.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될 것이다. 지금은 비록 희미하나 그 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분명하게 알게 된다.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년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의 모형이다. 그 험한 광야의 초막 속에서 보호해 주신 것처럼 지금은 성령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거하면서 동행하시고 보호해 주신다.


요14:16-20,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 안에 거하게 된다고 하셨다. 즉 하늘의 장막이 성도 안에 지어진다는 것이다.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은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준다고 하셨다. 그 보혜사가 성령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처소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처소란 집이다. 초막절식으로 말하면 장막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성도 안에 지어진 것이다. 옛 언약에선 가나안 땅을 주셨지만, 새 언약에선 성령을 주신다. 성령 안에서 장차 초막절의 실상으로 주어질 천국을 맛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새 언약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므로 이미 천국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은 비록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만 성령 안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살았고, 장차 예수님께서도 재림하시면 성도들의 눈물을 다 씻기시며 다시는 사망이나 아픈 것이나 고통이 없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초막절에 초막을 짓는 나무는 종려나무가지로 지었다. 종려나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 하실 때 백성들이 흔들던 나무이다. 그래서 종려나무는 왕의 나무 또는 메시아의 나무라고도 한다. 또한 종려나무는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천국의 나무라고도 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로 환영한 것은 평화의 왕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종려나무 가지로 예수님을 환영케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의 왕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그렇다면 초막절에 종려나무로 광야에 지은 초막은 평화로운 천국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되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다가 초막을 짓고 기드론 시내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흥건히 부었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령을 상징한다. 제단에 물을 붓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 속에 성취가 된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과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백성들에게 확인하고자 할 때 엘리야가 물을 제단에 부은 것과 같다.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타락한 왕이 아합 왕이다. 아합 왕은 시돈의 왕인 엣 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하였다. 이 때 이세벨이 자기가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신을 이스라엘에 들여왔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세벨의 영향으로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겼다. 왜? 여호와를 섬겨야 할 이스라엘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알과 아세라 신이 인간들에게 풍요와 다산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마귀는 항상 땅의 것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사람은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다.


빌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마귀는 광야에서 사십일을 주린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땅의 것을 보여주면서 절하라고 했다. 지금도 마귀는 땅에 속한 자들에게 땅의 것으로 붙잡아 둘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쉽게 받아들인 것은 이세벨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포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금송아지가 여호와라고 부른 것과 같다. 엘리야는 거짓선지자들이 말하는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내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가려보기로 하였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왕상18:30-35,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엘리야는 여호와가 약속의 하나님이심을 믿었기에 제단을 쌓고 물을 제단 주위로 흥건하게 붓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초막절의 제단에 물을 붓는 것은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시내 산에서 성막을 지시 받고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성막을 만들었고 성막 중심으로 살았다. 성막의 법궤 속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증거물들을  담아 놓음으로서 불순종에 대한 사실을 늘 기억하게 하셨다.


초막절 제단위에 붓는 물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라는 뜻이다. 제단위에 물을 부으면서 하나님이여! 우리의 행위를 보지 마시고 주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함에도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러한 본질적인 의미를 모른 채 초막절을 지냈다. 초막절만 되면 어김없이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 제단에 붓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물에 대한 설교를 하신 것이다.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 당시 초막절 절기를 지킬 때 첫 날부터 제사장은 금 주전자에 실로암 연못의 물을 길어와 제단 앞에 있는 그릇에 붓는다. 동시에 다른 주전자에 있는 포도주를 그릇에 부으면 포도주 썩은 물이 기드론 골짜기로 내려가는 예식을 가진다. 이 예식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초막절의 제단에 물을 붓는 모습을 보시고 그 물은 곧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지는 성령이라고 하셨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 물이 제단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겔47:1-12,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 찌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말씀하신 물은 장차 예수님께서 가셔서 보내 주실 성령이시다. 그 물이 제단에서 나왔듯이 성령도 참 성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올 것임을 알려 주신 것이다. 이렇게 성령이 오실 것을 구약성경에 약속 되었던 것이다.


겔36:26-28,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이 말한 새 영이란 성령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수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다.(행1;1-5)  이제 하나님의 약속대로 새 영이신 성령이 임한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성령이 생수처럼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 성령이 새 언약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진정한 초막절을 이루었다는 의미가 있다.

초막절과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 #.3

(3) 초막절의 영적 의미


유월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를 살펴보았고 그 다음 칠칠절 즉 오순절은 성령이 임함을 살펴보았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보내신 것이다. 십자가 전에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지시를 받아 사셨지만 십자가 이후에는 오히려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다. 그 성령이 임하신 것이 바로 종말의 현상이며 이미 추수가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초막절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이 된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추수가 끝이 난다.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를 영원히 완전하게 구별한다. 지금은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 그러나 주님 오시는 그 날에는 완전하고 영원한 분리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수장절이라는 의미가 새롭다. 곡식을 거두어 저장 할뿐 아니라 이 초막절에는 포도도 수확하여 저장 즉 수장한 후에 일주일간 이 절기를 지킨다. 알곡과 가라지를 어떻게 분리하는가?


마13:36-43,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초막절과 연결이 되는 것이 타작마당이다. 그리고 포도주 틀에 대한 말씀도 심판과 관계가 있다. 성경 한 곳을 더 찾아보자. 


계14:17-20,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계14:14-16, 은 역시 마지막 추수인데 곡식을 추수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17-20절은 포도를 수확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초막절의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에 대한 내용이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마무리가 된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이제 초막절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그 삶의 자세는 우리가 나그네라는 사실이다. 지금 어디에 살던지 간에 그곳에 영원한 집이 아니라 떠나야 할 임시거주지 즉 초막이다. 이런 초막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인 장막도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고후 5:1-10,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 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장막이 되어주신다.


계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이러한 모든 말씀이 다 신실하고 참되기에 반드시 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무너질 장막에 산다는 것을 알고 이제 다시는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한 영광의 몸이신 예수님을 소망하면서 밤에 잠자리에 누워 자는 집도 자기 몸도 무너질 장막임을 알고 영원한 장막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3) 초막절을 지키라는 이유


이스라엘백성들이 자기 집이 아니고 임시 집에서 살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초막절을 지키라고 한 것이다. 광야 생활은 임시 생활이다. 초막절을 모르는 자손들에게 우리가 애굽에서 나와서 우리 집에 도착하기 전에 광야에서 이렇게 초막을 치고 살았다는 것을 이야기 해 준다. 그 자자손손이 이것을 보면서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생활을 한 것을 부인하지 않게 되었다. 초막절은 초막을 치고 살면서 8일 동안 지켰다. 초막절은 광야에서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정착되지 못한 초막에서 사는 것을 보여 주었다. 초막 생활은 어렵다. 초막생활이 8일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간다. 집은 따로 있다. 초막 생활이 어렵지만 집이 있기 때문에 참고 지내게 된다. 초막절을 지키라고 한 것은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대들에게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신세대들이 과거 36년 동안 일본 사람들에게 지배를 받았던 체험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다. 매년 8.15 광복절을 지키면서 힘이 약한 민족이 어떤 결과를 당하게 되는지의 교훈을 받으며 애국정신을 계승하게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초막 생활을 하고 있다. 초막은 우리 집이 아니다 우리 집은 따로 있고 지금 사는 집은 임시 집이다. 성도는 이 세상이 영원히 살 곳이 아니다 우리 집은 저 하늘에 있다. 초막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깨닫는 것은 우리 집이 있으니까 조금만 고생하라 자녀들에게 몇일만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어렵지만 초막 생활을 하는 것이다


요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절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첫 날부터 피를 발라 살게 하시고 또 예수님의 몸을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주어서 먹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같이 다시 부활 하도록 만드시고 그것을 떡으로 드려져서 하나님 나라의 창고에 드려지는 것을 예표 하는 것이 절기다.

 

히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한 성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한 성을 준비하고 계신다. 성도의 삶이 어떤 때는 참으로 힘들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소망을 둔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께서 예비하시는 곳을 본향으로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다. 힘이 들더라도 참고 기다리면 주님께서 좋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 하실 것이다. 그 성에 들어가기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4) 초막절 절기의 의식


초막절은 7일간을 오두막집에 거하면서 첫날과 마지막은 성회로 모이고 또한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안식할 것이요 7일간 계속하여 화제의 향기가 여호와께 타오르도록 해야만 한다. 성경시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수천 년의 길고도 험난한 고난을 겪어 오면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상실치 않고 지속적으로 지켜오고 있다. 유대인들이 신앙을 지켜오고 또한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일은 절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유대인들의 명절로서는 성경에서 3대 명절인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이 있다. 유대인들의 명절은 단순히 먹고 즐기는 축제이기보다는 그러한 즐거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축제의 근거는 명확하다. 유대인들의 명절은 선조들이 경험하였던 여호와 신앙의 중요한 요소들을 재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명절을 지켜 오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선조들이 지켜온 신앙을 자신들의 삶으로 이어질 수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의 명절은 축제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재확인하는 과정이며 자신들이 실제적으로 그러한 역사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초막절의 예배의식은 하나님께서 명한 대로 지켜야 한다.(신16;16-17). 유대인들의 명절 중 초막절은 일 년 동안 땀 흘려 가꾼 농작물을 거두어들인 후에 지키는 명절로 오늘날 추수감사절과 같다 할 것이다.

 

(1)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때에는 반드시 이스라엘의 20세 이상 남자들은(출23:17) 예루살렘 중앙 성소에서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중심한 신본주의적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출23:14; 34:23). 특별히 '여호와의 택하신 곳'이란 말이 신16장에서만 6번(2,6,7,11,15,16절)이나 기록한 것은 위의 절기들을 지킬 장소를 명백히 지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장소는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시는 예배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장소를 정해준 것은 우상종교의 세상 방법과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초막절은 하나님 여호와의 절기이다. 여호와의 절기란 하나님께 속한 명절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절기 때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야하는데 이 택하신 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가 되면 많이 백성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모였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초막절을 맞이하여 먼저 그의 형제들을 예루살렘으로 올려 보내고, 자신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초막절을 지켰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모든 성도들은 감사 절기에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다.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초막절의 의식이다. 초막이란 임시로 허름하게 만든 움막이다. 유대인들이 초막을 만드는 일에 특별히 중요한 부분은 초막의 지붕인데 초막 안에 누우면 천장을 통하여 하늘의 달과 별들이 보여야한다.


느8;15-18,에 기록된 대로 감람나무, 버드나무, 종려나무나 화석류 나무 가지로 짓고 지붕은 얼기설기 달과 별도 보이게 지었다. 이것은 초막이 완벽한 거처가 아니라 무엇인가 불완전한 거처임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에 초막의 사면 벽은 완벽하게 밀폐시켜도 무방하므로 튼튼한 천으로 벽을 둘러 만든다. 초막 내부에는 초막절의 즐거움을 표현키 위하여 여러 가지 장식도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한다.


(2) 자녀와 함께 지켜야 한다.


여호와의 절기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한 이 말은 너희가 너희 자손에게 꼭 가르쳐 주어야 할 절기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그 부모가 자녀와 함께 초막절을 지키면서 초막의 지붕위로 보이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유대민족은 별을 보고 살아 온 민족임을 가르쳐 주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간 초막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절기인 초막절을 통해 일 년간 하나님이 주신 큰 복에 감사하였다. 자연(自然) 속에서 주신 복뿐만 이 아니라 역사(歷史)속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을 지켜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役事)들을 기억하고 가장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자녀들에게 교육하였다. 절기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뿐만 아니라 공수로 나아오지 말고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드리라고 했다. 애굽 바로왕의 박해로부터 히틀러의 박해까지 3300년간 자유롭게 활동한 것이 아니라 별이 비치는 밤에만 그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교육을 하였다. 지금도 이 초막절에 초막에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교육을 위해서 너와 네 자녀와 함께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초막절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부터 초막을 짓기 시작하는데, 가장인 아버지와 자녀들이 서로 도와가며 함께 어울려 초막 짓는 즐거움을 나누게 된다. 오늘날에는 도시 사람들이 대부분 아파트에 거주하므로 초막을 짓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아파트 옥상이나 뜰에 짓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회당 안에다 짓는다. 현재 이스라엘에선 아름다운 초막 뽑기 경연대회를 벌이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은 초막을 어떻게 짓느냐? 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절기를 지킬 때에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라고 하였다. 너희끼리만 좋아하지 말고 성중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즐거움을 나눠라 는 뜻이다.



(3) 가난한 자와 함께 연락해야 한다.


초막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절기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수문 앞 광장에서 큰 부흥회가 열렸을 때 저들이 초막절을 지키지 못한 것을 깨닫고 성대히 초막절 절기를 지킬 때 느 8:10에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하여 초막절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이나 소외된 자들과 함께 명절을 즐겁게 지킬 것을 권하고 있다. 이런 이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절기 이다. 초막절은 모든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한다. 칠칠절에도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지만 초막절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과부와 고아와 함께 잔치하라고 하였다. 이것 역시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객과 고아와 과부처럼 살았던 것을 기억하고 또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출애굽 시켜 주시고 또한 약속의 땅에 거하게 하신 것을 감사하게 하는 장치이다. 즉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빈손으로 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힘대로 물건을 드리는 것도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내년에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이웃과 나눌 수 있다.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 것이라 하였다. 이미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고 또 복을 주실 것이기에 수확물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며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기를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4)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되 형식적으로만 섬기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으로 여호와 앞에 올 때 공수로 오지 말라고 한 것이다. 고대 팔레스틴의 풍습에 의하면, 백성들이 왕 앞에 나아갈 때 예물 없이는 절대 나아갈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의 왕 되실 뿐 아니라(사44:6) 만왕의 왕이시니(딤전6:15), 그 앞에 나아갈 때 빈손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권면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여호와께 공수로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 지니라, 하셨다. 초막절은 일 년 내내 농사를 잘 짓도록 비와 햇빛을 주시고 도와주신 하나님의 복과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이다. 따라서 초막절에는 풍성한 곡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농사를 지어 곡물을 거두는 일에는 감격과 감사가 주어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스라엘의 대부분 지역은 비가 적고 토양이 좋지 않다. 연중 강우량이 100mm정도밖에 안되고 흙은 고운 밀가루와 같기 때문에 바람만 불면 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다. 비가 적은 대신 이슬로 농사를 짓는다. 이슬이 내리는 날 수가 약 150일 전후가 되기 때문에 많게는 18Cm 가량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곡식을 추수할 때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가 없다.


시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그래서 추수 때에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 아름다운 결실을 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격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마음의 고백이다. '감사' 라는 말은 '드린다.' 라는 뜻이다. 정말 감사하려면 감사하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한다. 여호와께서 주신 복에 따라 힘대로 바치면 다시 하나님께서는 넘치도록 복을 채워 주신다는 것이다.(눅6;38) 사도 바울은 헌금과 구제의 올바른 자세는(고후8:11,12)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했다.(고후9:7), 반대로 자신의 힘에 겹게 바치므로 도리어 시험에 빠지는 것과 같은 허장성세(虛張聲勢)는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행5:1-11, 딤전6;10)


드리되 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② 힘을 다해 드리고

          ③ 즐거움으로 드려야 한다.


문제는 도시교회 교인들은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또한 경제 사정이 최저인데 감사드릴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렇기에 초막을 짓고 거기서 절기를 지키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광야생활 하던 때에 초막 생활하던 그때를 비교해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농사를 짓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의 복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16:17에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한 말씀을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어떤 것인가를 돌아보아야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감사의 제목이 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쌓이고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쌓인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는 감사하면서도 "영원한 생명" 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 같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우리가 감사하는 만큼 믿음이 생기고, 감사하는 만큼 기쁨이 생기며, 감사하는 만큼 평강을 누리게 된다. 감사하는 만큼 능력을 가지게 되고, 감사하는 사람이 세상을 이기게 된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실 것으로 믿는다. 스펄전 목사는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고 말했다. 감사한다고 당장 환경이 바뀌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감사할 때, 우리 자신이 바뀌고 우리의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인생과 환경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초막절 절기를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나의 신앙적 결심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5) 초막에서 즐겁게 지내야할 이유


레23:39, 에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7월15일부터 7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8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실과와 종려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여호와 앞에서 7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니라.

 

초막절 첫날 네 가지 종류의 나무를 손에 들고 흔들며 기뻐한 것은 추수를 완전히 마친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절기임을 뜻한다. 이렇게 즐거운 절기에 초막에 거하라 하신 이유는 레23:43,에 기록된 대로 출애굽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에 거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 과거에서 오늘을 조명해 보라는 것이다.


초막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웠던 과거로 되돌아가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그곳으로의 입국을 소망하였다. 그들의 믿음과 소망대로 가나안에 입국하여 정착된 생활을 하며 토지의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나안 입국의 감격을 점차 식어가고, 그 대신 가나안의 이런 저런 불편한 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감사절기인 초막절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초막에서 지냈던 광야생활로 되돌아가 오늘을 조명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초막절은 그냥 햇과일과 열매를 많이 먹으며 기뻐하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7일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믿음을 회복하는 영적 각성의 기간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믿음을 회복하는 기간이요,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충성을 새롭게 다짐하는 기간이며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을 실천하는 기간이다


(2) 하나님의 극대화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초막으로 나아가는 것은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초막에서의 생활은 분명히 불편하고 불완전한 생활이다. 그러나 그런 생활 속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언제나 함께 하셨다. 불기둥 구름기둥이 늘 그들의 진 곁에 있었으며, 아침마다 만나가 내리고, 때로는 메추라기를 몰아오기도 하셨다. 물 없는 광야에서는 바위를 쳐서 물이 솟아나게 함으로서 갈증을 해결해 주셨고 사막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자연 환경 앞에서 인간은 극소화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극대화가 되셨다. 강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고, 자연스럽게 인간의 극대화가 대두되게 되었다. 그에 따라 하나님은 극소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초막으로 나아감은 뒤바뀐 신앙의 순위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함인 것이다.


(3) 상실한 소망을 되찾으라는 것이다.


광야의 초막이 의미하는 것은 잃어버린 소망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광야를 방랑하는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비록 초막에 거하였지만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희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불편한 생활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적지가 있었다. 인간은 소망을 먹고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삶의 활력을 경험한다. 가나안에 입국하여 정착한 것은 그동안 꿈꾸어 왔던 소망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나안 정착이 결코 소망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소망을 위한 한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가나안 땅 입국 이후에는 가나안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소망을 소유해야 한다. 초막으로 나아감은 미래의 소망으로 불타올랐던 과거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새로운 소망을 되찾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4) 복 주실 것을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신16:15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이스라엘 땅은 비가 부족한 지역이므로 내년에도 하늘 문을 열고 많은 비를 내려 풍성한 결실이 있어 포도주가 주는 기쁨을 누릴 것을 기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미래적인 감사이다. 비록 금년 농사가 페 농 되었다 할지라도 내년에는 더 풍성한 결실이 있을 것을 소망하고 즐거워하고, 비록 직장에서 퇴직을 당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더 좋은 직장을 주실 줄 믿고 즐거워하고, 비록 금년에는 사업에 실패했더라도 내년에는 큰 복을 주셔서 사업이 크게 성공하도록 복 주실 줄로 믿고 즐거워한다. 진정한 감사는 바로 미래적인 감사이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다 민주화 운동 인사로 유신 정권 때 감옥에 들어가 실직하여 10년 만에 복직하여 학장이 되신 <김찬국 교수>가 있다. 10년 만에 복직하여 첫 월급을 감사헌금으로 드리며 하는 말이 인간은 참 간사하고 무지하지요 매달 꼬박 꼬박 봉급 탈 때는 감사한 줄 모르다가 10년 만에 월급봉투를 받아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하는 존재이거든요 하나님 내년에도 이렇게 드려질 수 있는 복을 주옵소서! 했다고 한다. 지난날의 좌절과 실망, 실패의 삶들보다 앞으로 소망의 날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진정한 감사이다. 초막절에 지키는 이유는 레23:39-44에 기록했다.


레23:39-44, 에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찌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찌니라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찌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 하였더라”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것을 대대에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레위기 23:43). 출애굽한 후에 광야생활 한 것을 대대에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유월절도 칠칠절도 출애굽과 관련이 되어 있듯이 초막절도 출애굽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 나라이다. 즉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나온 백성인지를 삼대절기를 통하여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6) 이스라엘 민족과 초막절


느8:13-18, 에 보면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여서, 율법 책을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칠월 절기에 초막에 거할 찌니라 하였고,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 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 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취하여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하였는지라,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 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칠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제 팔일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1) 이스라엘은 초막절을 어떻게 지켰는가?


초막절을 성대하게 지키기를 바라는 여호와의 기대와는 달리, 저들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느혜미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이 절기를 지켰다는 기록이 없다. 가나안 정복 이후 한때 융성하였던 400여 년간에 걸친 사사시대에도, 다윗과 솔로몬에 의한 태평성대가 지속되던 초기의 왕국시대에도 초막절은 이행되지 않았으며 그 후 나라가 망하고 70년의 바벨론 포로시대가 끝나는 때 겨우 죽다 남은 귀환한 백성들에 의해서 비로소 초막절이 지켜졌다. 에스라가 율법 서를 낭독하니 초막절에 대한 말씀이 나왔고 마침 그때가 초막절 절기이기에 초막절을 지켰는데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행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에 들어붙어서 위엣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다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시는 과정을 통하여 초막절의 의미를 새롭게 하여주셨다. 그렇다면 유월절과 칠칠절을 제대로 지켰는지 살펴보니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다는 것을 이미 확인하였다. 유월절은 요시야 왕 때 제대로 지켰는데 사무엘로부터 이렇게 지킨 적이 없다고 하였다. 초막절은 어떨까요? 사무엘이 아니라 아예 여호수아까지 소급하여 올라간다. 모세 때는 어쩔 수 없이 초막에서 살아야했다. 초막만이 아니라 광야에서 산 기간은 장막에서 산 것이다. 텐트를 치고 살았다만 텐트를 치면서 초막은 함께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고서는 초막절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단지 여호수아 때까지 언급하는 것은 여호수아 때에 초막절을 잘 지켰다기보다는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기에 그렇다고 보인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사람이 거주가 안정적이고 편하면 옮기기를 싫어한다. 우리도 일 년에 한 일주일씩 초막에서 지냈으면 체험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추수를 다하고 한 주간 야외로 나가 텐트치고 지내면서 이스라엘백성들의 광야생활을 돌아보면 곧 집이 좋다고 돌아가려는 마음은 천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집짓고 살면서는 초막절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나그네임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천국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붙잡혀 살았기 때문에 초막절을 지키지 아니한 것이다. 이제 초막절에 우리는 나그네임을 실감하면서 더 이상 이사하지 않아도 될 영원한 장막,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그 장막을 소망해 보아야 한다.


(2) 예수님은 초막절을 어떻게 지켰는가?  


물론 초막절을 잘 지킨다고 지켰다. 특히 초막절에는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에서 제사지낼 때에 전제처럼 부어드린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구약 율법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후대에 유대인들이 추가하여 장로의 유전처럼 지킨 것으로 보인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


요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아무리 물을 길어다가 성전에 부어도 그것이 농사의 풍요로움과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을 보내셔야 생수가 흐르는 것이다.


7) 초막절의 완성


이스라엘이 초막절을 지키는 날에 저들이 광야생활의 쓰라림을 회상하면서 인생이란 마치 나그네에 불과함을 실감해야만 했던 것처럼, 오늘의 성도들이 천국을 향한 순례의 길에서 오직 지상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고 미래의 성을 찾아 가야한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 있게 느껴야만 할 것이다. 이 사실을 예표한 것이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성전에 올라가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장사 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보내신 것이다. 십자가 전에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지시를 받아 사셨지만 십자가 이후에는 오히려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다. 그 성령이 임하신 것이 바로 종말의 현상이며 이미 추수가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초막절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이 된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추수가 끝이 나고 알곡과 가라지를 영원하게 완전하게 구별하실 것이다. 지금은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으나 주님 오시는 그 날에는 완전하고 영원한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장절이라는 의미가 새롭다. 곡식과 포도를 수확하여 저장한 후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장막에서 살게 되는 날에 비로소 나그네 생활이 끝나고 초막절은 완성될 것이다.


마13:36-43,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초막절과 연결이 되는 것이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에 대한 말씀이다.

계14:14-16절은 역시 마지막 추수인데 곡식을 추수하는 내용이다.

계14:17-20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초막절의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에 대한 내용이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마무리가 된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이제 초막절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그 삶의 자세는 우리가 나그네라는 사실이다. 지금 어디에 살던지 간에 그곳에 영원한 집이 아니라 떠나야 할 임시 거주지 즉 초막이다. 이런 초막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인 장막도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고후 5:1-10,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 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장막이 되어주실 것이다.


요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히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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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전체 주제는 <죄>
출애굽기의 전체 주제는 <구원>
레위기의 전체 주제는 <거룩>
민수기의 전체 주제는 <교회>
신명기의 전체 주제는 <교육>

레위기는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제시합니다.
레위기의 전체 요절은 하나님이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11:44,45, 19:2, 20:26)


1.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신 곳은?

(1절)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회막(會膜) the tent of meeting(출애굽기 27:21) / KJV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회막(오헬 모에드)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즉 그리스도의 거주를 예표하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회막은 여러 용어로 표현합니다.
성막(출 26:9)
증거막(출 38:21)
법막(대하 24:6)
여호와의 전(출 23:19)
여호와의 장막(왕상 2:28)

cf. 성막(聖幕) the tabernacle.(출애굽기 26:27)
성막 저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요 성막 뒤 곧 서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며.

cf. 장막(帳幕)  tents (출애굽기 13: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2-3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예물(禮物)이란 히브리 단어는 "고르반"과 "테루마"라고 합니다.

고르반 : 제물, 희생물, 제단 가까이 가져온 것
 
테루마 : 선물(올려서 바치는 것) 요제, 봉헌물, 바친

예물(禮物)과 제물(祭物)
예(禮)는 정성을 다하여 드린 예물
제(祭)는 제사를 위해 바쳐진 예물

예물은 바치는 사람의 자세를 강조
제물은 제사에 드려진 물건을 강조

3. 번제의 제물의 종류는?

(3절) 소의 번제 : 흠없는 수컷
(10절) 양, 염소의 번제 : 흠 없는 수컷
(14절) 새의 번제 :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

수컷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목축을 할 경우 암컷은 새끼를 낳기 때문에 수컷 보다 더 가치가 높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수컷은 주로 식용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제사를 위해 바치는 것도 부담을 적게 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4.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는?


성경에서 향기, 냄새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은 레위기입니다.
레위기에는 제사를 설명할 때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제사에는 늘 냄새가 있었습니다.
제물을 태울 때 나는 냄새입니다.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서 나는 향기, 하나님께 드려질 향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서 제물이 될 때 나는 냄새입니다.
우리가 산 제물 될 때, 자아의 죽음이 만들어내는 냄새입니다.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가장 아름다운 향기는 예수의 향기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렸습니다.
예수 십자가 향기는 개선 행진의 냄새가 그렇듯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냄새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망의 냄새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십자가를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나고, 누군가는 십자가만 보면 화내고 짜증을 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내가 죽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서 예수의 향기가 납니다.
상처 안 받으려고 피해 다니고, 죽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면 우리는 향기 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상처받고 죽을 때 비로소 내 안의 예수 향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가 타버릴까 봐 방화복을, 자아가 죽을까 봐 방탄복을 입고 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 드릴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옛 자아가 죽으면서 나는 냄새가 진동해야 합니다.
내 맘이 상해서 나는 냄새, 내 자아가 타들어 가는 냄새,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꽃길이 아닙니다. 가시밭길입니다. 하지만 그 가시밭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내가 스스로 산 제물이 될 때 나는 그 냄새가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하나님,
우리로 하나님께는 향기로운 냄새를,
사람에게는 예수 생명을 흘려보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번제
1)제물은 소,양,염소,비둘기입니다.(친숙...나를 드림의 의미)
①제물의 차이는 경제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를 바칠 수 있는 형편은 소를 양 을 바칠 수 있는 형편은 양을 가난한 자는 비둘기(새끼)를 바치도록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입니다
②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소유한 것 가운데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300 데나리온이든,과부의 두 렙돈이든,어린아이의 오병이어든,모세의 마른 막대기든....
③흠없는 것이여야 합니다. 말라기때 흠있는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병든 것을 가지고 오다 하나님께 책망과 징계를 받는 것을 본다. 준비된 믿음과 정성이 담긴 하나님의 받으심직한 향기로운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사1장-헛된제물 가져오지마라-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암5:22번제나 소제를 드릴 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다림줄에서 어긋났다.

2)다른 제사와 차이점
①번제는 향기로운 냄세를 발하는 제사입니다.(9)(속죄제는 향기로운 냄세가 없습니다)
②번제는 제주가 열납되기 위한 제사입니다.(3,4)(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열납)
③번제는 생명 있는 제물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소제는 고운가루로 드림)
④번제는 제물 전체가 태워지는 제사입니다.(화목제는 부분적으로만 태웁니다)

3)번제의 특성
①번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입니다.(2,3)-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우선
②번제는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2,3)-예수님도 자신을 자원해서 드림
③번제는 안수가 있는 제사입니다.(4)-자기 죄를 고백함과 죄를 전가 시킴
④번제는 죽음과 피를 강조한 제사입니다.-죄는 죽음,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⑤번제는 각을 뜨야 됩니다.(6)-가죽을 벗긴다는 것은 위선,거짓,외식을 벗고,각을 뜬다
는 말은 먼저 뿔을 자름-교만을 자름, 다음 다리를 자름-세상 향하던 발을 자름.
⑥번제는 정강이와 내장을 강조한 제사입니다.-마음과 행위,내면과 외면을 씻어야 받음
⑦번제의 제물은 완전히 불살라 졌습니다(9)-완전히 바쳐짐(헌신)을 의미합니다.

4)번제로 드려진 흠없는 제물은 곧 완전하고 아무 흠도 없으셨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다 태우는 것은 남김 없는 헌신을 말합니다.
완전한 희생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제사 드리는 자는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제물을 모두 드려 태워야 합니다.
다 태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9절) (13절) (17절) 화제(火祭)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어느 유명한 불고기 집을 지나갈 때 식당에서부터 번져나오는 고기 굽는 냄새를 맡아보셨습니까?
그 냄새가 참 자극적입니다.
화제는 제물을 불로  완전히 태워서 그 연기가 올라갈 때 드리는 제사 방법입니다.
 

제사의 종류에는 다섯 가지 제사로 구분합니다.
5대 제사(레위기 1장-5장), 7대 절기(23장)

번제
(燔祭, burnt offering) 올라 / 올라가다, 완전히 태워진, 온전히 바쳐진 삶 - 십자가
소제(素祭, grain offering. serial offering.meat offering) 민하 / 선물, 가루가 되는 자기 희생 - 겸손
화목제(和睦祭, fellowship offering. peace offering. freewill offering) 제바흐 쉘라밈 / 평화를 위한 제물, 관계 회복을 위한 제물 - 성찬
속죄제(贖罪祭, sin offering) 하타트 / 벗어나다, 목표에서 벗어난 - 회개
속건제(贖愆祭, guilt offering. trespass guilt) 야삼 / 보상, 배상, 죄책, 이웃과의 관계 회복 - 용서(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제사를 드리는 방법은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화제(火祭, fire offering)
거제(擧祭, heave offering)
요제(搖祭, wave offering)
전제(奠祭, drink offering)
- 관제(灌祭)(정성드릴 灌. 물댈 灌)  디모데후서 4:6, 빌립보서 2:17,

10.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역시 수컷으로 드리면 된다. 14절에

11. 그가 단 북편에서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12. 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그 머리와 그 기름을 베어 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다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13.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구약의 번제를 드리는 방법 

1. 제물에 안수(레위기 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안수}(사마크 야도, )는 자신의 손을 얹는다는 말인데 그 의미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직접 자신의 손을 제물 위에 놓아야 하고 얹을 때 힘껏 누르면서 얹어야 했습니다. 안수(按手)는 피차간에 서로 연합을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안수의 목적은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건네주기 위함입니다. 제사장은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드리는 자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제물이 태워질 때 제물을 드리는 자의 죄도 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가 직접 피를 흘리지 않고도 자신과 연합된 안수 받은 제물의 피흘림을 통해 자신의 죄를 속함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는 자신의 죄를 가지고 죽어 가는 제물을 보면서 속죄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2) 제물을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1장 5절에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수송아지}( )는 직역하면 '소의 아들'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 말은 일년 된 송아지와 성숙한 소에 함께 사용되는 단어로서 어떤 경우에든지 늙지 않은 어린 소에 해당하는 의미입니다.

여기 {잡는다}는 말 자체가 거칠고 처참한 죽음을 연상시킵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죄 때문에 흠 없는 동물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장차 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되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표입니다(요일 2:2; 갈 3:13). 그리고 잡은 짐승의 피를 단 사면에 뿌리는 것은 하나님께 이 제물이 온전히 바쳐졌음을 보여드리는 공개적인 행위입니다.

3)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1장 6절에 {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이유는 첫째는 성결의 의미로 가죽을 벗겼습니다. 둘째는 제물의 완전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벗긴 가죽은 제사장이 가지고 갔습니다(레 7장 8). 각을 뜨는 첫 번째 이유는 제물의 각 부위에 불이 잘 타도록 하기 위함이요 둘째 이유는 그 제물을 빠짐없이 모두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4) 제물의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어야 한다고 했습 니다.

본문 1장 9절에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는다는 말은 아직도 내장에는 짐승이 먹었던 음식물이 소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갱이 역시 땅에 접촉한 부분이기 때문에 성결상 씻어야만 했습니다(출 20장 17).

제물은 불살라야 한다

9절,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불살라 번제를 드린다는 말은 제물을 불에 태워서 연기와 김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기 위하여 제물의 각 부위를 정성껏 불에 태운다는 말인데 이로써 번제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화제(火祭)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고 했습니다.

짐승을 잡아 화제로 드릴 때 나는 냄새를 가리켜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후각으로 생각할 때 고기 태우는 냄새가 향기가 난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오히려 비위를 거슬리는 냄새일 것입니다. 여기에 『여호와께』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후각에는 좋은 냄새가 되지 못할지는 몰라도 하나님께는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여기

"향기로운(니호아흐)"
'편안한'(comfortable) 혹은 '휴식'(restful)이라는 뜻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고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물을 드린 자와 거룩한 교제를 하시면서 그를 만족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가리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했습니다(엡 5:2b).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an offering and a sacrifice to God for a sweetsmelling savour.

그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이 향기로운 제물은 곧 샬롬을 가져왔습니다.
이 샬롬은 세상이 주는 평화(peace)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참 평화가 없습니다.
참 평화는 영혼의 평화입니다.
따라서 이 평화는 하늘 위에서 내려온 평화입니다.

구약의 번제가 신약의 예배에 주는 진정한 의미

히브리서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구약의 사람들은 아직 신약에 나타날 어린 양 되신 예수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입니다.
제사장들이 드렸던 구약의 번제나 예수님께서 친히 제물이 되셨던 십자가의 죽음이나 그 목적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표이며 상징일 뿐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제사였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번제와 속죄제를 드림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신약에 우리의 영원한 제물로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오실 메시야를 믿고 구원받았고 신약의 사람들은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예배는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번제물은 철저히 신약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오늘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번제물에 대한 안수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므로 번제물인 짐승에게 자신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한 영원한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십자가의 보혈로 단번에 해결하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졌다는 확신을 가지고 교회 운동을 해야 합니다.

2) 산제물이 된다는 사명감으로 교회운동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번제는 짐승의 모든 부위가 불에 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희생이요 빈틈없이 완벽하게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이 되는 예배 행위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찬송도 희생도 봉사도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의 자세는 분명히 그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거룩한 사명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신약의 교회운동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기로 작정된 택자를 찾는 사명이 오늘 신약교회가 받은 사명이며 우리의 예배는 이것에 대한 서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편에 보내 준 선물로 자신의 생활이 풍부해졌다고 하면서 빌립보서 4장 18절에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짐승을 잡고 태우는 냄새가 결코 향기로울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향기롭다고 한 것은 신약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그 희생이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온 세상에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정결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구약에 번제물과 번제를 드리는 방법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넉넉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엡 5:2,  빌 4:18,  요일 2:2).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그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항상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은 이미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구원받기 위하여 예배하는 것과 이미 구원받은 데 대한 감사로서의 예배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때로는 무기력할 수 있고 실망할 때도 있지만 후자는 전자와는 달리 항상 타오르는 감격과 감사로 충만한 것입니다.
내가 살까 죽을까, 될까 안될까 하는 불확실 속에 사는 사람은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고 주위 환경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서 살아난 감격으로 삽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케 되는 소망 안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걱정과 근심이, 불안과 초조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마침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