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란 무엇인가?
1. 중보기도의 사건개요
최근 교계는 ‘중보기도’란 용어를 조심 없이 사용하며, 심지어 “중보기도 합시다. 중보기도에 동참합시다. 중보기도 학교, 중보기도 훈련 중보기도 팀 등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인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성도간의 서로를 위한 기도’ ‘남을 대신한 기도’ ‘성도가 함께 올리는 간절한 청원’등을 ‘중보기도’ 라는 개념으로 대체하여 별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다. 과연 그렇게 해도 되겠는가? 중보자가 누구인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중보기도 팀을 구성하는가 하면 타인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 사역으로 오해하는 교회가 점점 많아져서 이를 바르게 지도하기 위하여 중보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연구하게 된 것이다.
2. 중보의 언어학적 배경 및 용어
1) 언어학적 배경
영어성경에는 “mediation”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있지 않으나 희랍어 신약 성경 안에는 중보자(메시테스)라는 용어가 6회 사용되어 있고 이와 동일한 어원을 지닌 “헤메시투세” 가 하나님을 주어로 한번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양자 간을 중재하며 이로써 일종의 보증을 제시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중보자는 양자 간을 중재함으로써 양편의 대리자가 되며 또한 양자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정의가 실행될 수 있도록 이에 대한 보증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희랍어(헤메시투세)가 사용되어 있는 신약성경 안에는 화해의 의미가 한층더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효율성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한 층 더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학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이셨는데 이는 항상 “이질적인 것” “사이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 으로서 이 용어는 흔히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대한 의미에 있어서 대화의 통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중보라는 용어의 용례
중보라는 용어는 기독교에 있어서 전문적으로 사용되었다할지라도 그 의미가 극히 모호한 용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종교에는 필연적으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그리고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구분되어 있으며 다양한 존재의 범주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될 경우 여기에는 반드시 일종의 중보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이 중보의 개념이 종교적인 개념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수립하고 이를 유지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중보의 개념은 반드시 인간의 죄악성에 대한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서로 다른 두 양식 사이의 분리에 대한 개념을 한층 더 보편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불순종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호소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도 악한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일련의 계약들을 준수해야만 했으나 하나님의 모든 도우심에도 불구하고 결코 선을 행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자신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그 스스로 방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를 인간에게 보내심으로써 강구하셔야만 했다.
중보자나 중보의 뜻은 “사이에 들다” “중재하다” 라는 의미로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내려오시는 것은 납득이 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인간의 죄로 불가능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성경적인 용례로 중보자와 중보는 인간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활동의 필연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에서 중보자나 중보는 매우 특수한 의미를 지닌 연구의 대상이라 하겠다.
3. 중보란 무엇인가?
중보의 문자적인 개념을 살펴보면 먼저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중보하다(intercede)는 “사이로 들어가거나 통과하다” “서로 다투거나 사람들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당사자들 사이에서 활동하다” “중재하다” “조정하거나 중재하다” 의 조정을 의미한다. 조정한다(mediate) 라는 뜻은 아래와 같다.
1) 양극단 사이에서 양자 모두의 친구로서 당사자들을 중재하다.
2) 화해시킬 목적으로 적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협상하다.
3) 화평을 조정하다, 라는 중보의 뜻으로 나타난다.
즉 조정(mediation)을 정의하고 중보가 조정을 정의하고 있다. 이런 정의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중보의 개념은 조정하고 양자 사이에 들어가서 서로를 위해 변론하고 법적인 상황에서 상대방에 대해 한쪽을 대표하지만 그러나 한쪽에 국한되지는 않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중보의 히브리어 파가(paga)는 “만나다”라는 뜻이다.
시85;10 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라고 했다. 긍휼과 진리와 의와 화평의 하나님은 죄인에게 접촉될 수 없다. 죄를 멸하시는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만 죄인인 우리가 “의” 자체가 되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요 14;6 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한 말씀과
딤전2;5 에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라 하였다.
이로 보건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중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4. 중보기도란 무엇인가?
중보기도란 용어는 딤전2:1의 엔튜크시스(enteuxis)의 번역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하였다. 1993년에 출간된 ‘표준 새번역 성경’이 “…간구와 기도와 중보의 기도와 감사를…”이라고 번역하였다. ‘개역 성경’에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로, 1977년의 외경을 포함한 ‘공동 번역’도 “…간구와 기원과 간청과 감사의 기도…”라고 하였으며, 같은 동양권의 ‘중국성경공회’의 성경(聖經)은 이를 『…간구(懇求) 도고(禱告) 대구(代求) 축사(祝謝)…』로 번역하였으나 중보기도란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엔튜크시스’는 역본에 따라서 도고(禱告:개역), 간청(懇請: 공동), 대구(代求: 중국), 중보기도(仲保祈禱: 표준)로 번역되었다. 대개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청원 기도" 혹은 아브라함의 소돔을 위한 기도(창18:16-33)나 모세의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민14:10-19)처럼 “누구를 위한 청원”으로 풀이된다. 프라임(Derek Prime)은 이 용어에 대하여 “하늘에서 성도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간구하시는 중보기도”(롬8:34; 히7:27; 9:24; 13:15; 요일2:1)와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하시는 성령의 간구”에 사용되는 전용 술어라 하였다(롬8:26,27). 따라서 “…위한 기도, …대신한 기도, …와 함께 하는 기도” 등의 용어를 사용함이 좋을 것이다.
딤전2;1-2, 에 보면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한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를 섬기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는 기도의 네 가지 종류인데 그중 세 번째 도고, 라는 용어는 별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도고는 글자 그대로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말한다.
“중보기도의 능력” 이라는 책에 보면(p35) 중보기도에 관련된 용어로 첫째 합심을 말한다. 합심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고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을 중보기도, 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한 표현이 아니다. 사도행전 1장에 나타난 120명의 성도들이 합심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지, 이것을 중보기도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은 표현인 것 같다.
기독교 대백과 사전의 중보기도에 보면 전체 교회와 국가와 성직자와 귀족과 평민을 위해 중재하고 고인을 기리는 기도는 기도의 형태로 성공회 교회법 55조(1604년)는 설교에 앞서서 설교자들이 이 기도를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그 기원을 보면 고대의 전례에서 설교나 복음서 낭독 이후에 등장했던 흔히 연도 형태의 도고 중보기도에서 유례 하였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의 성 금요일 전례의 기도문과 일반 라틴 미사문의 독립된 오레무스에 잔존하여 있다. 9세기 경 사제는 일요일과 축일의 미사에서 설교 후에 모든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인을 추모하였다.
처음에 그것은 사제의 재량에 맡겨졌으나 점차적으로 일정한 형태를 펴 나갔다. 오늘날 중보기도는 대학교와 재판 설교와 국가 절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한국 교계에서 중보기도, 라 하여 많은 교회들이 사용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 성도의 ‘중보기도’는 기독교 교리 체계를 위협하는 용어이다.
1)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직과 중보기도를 손상시키고, 비성경적인 교리의 출현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속론적 의미로 사람에게 중보 혹은 중보자란 이름이 사용된 곳이 없다. 물론 중보기도란 말도 사용되지 않았다. 칼빈은 성도들이 올리는 ‘서로를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하시는 중보기도의 되울림”(시편20:2주석), 또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에 의존하고,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중보와 제사장직에 참여하는 기도”로 이해하였다(벧전2:9의 주석), 그리고 “그리스도는 구속의 중보자요, 신자들은 기도의 중보자”란 궤변을 철저히 경계하였다. 성도가 중보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중보직의 손상과 예수님의 고유한 중보기도를 왜곡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로마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중보기도’나 ‘성자들의 중보기도’와 연계되어 교리의 혼돈을 초래한다.
로마 카톨릭의 중보기도는 9세기에 활발하였다. “칼빈 당시에도 ‘성자의 숭배’나 ‘죽은 성자들의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가 유행하였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성자들의 중보기도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직의 영예 박탈과 중보직의 완전성 부인”이라고 비판하였다. 중보기도란 용어가 교회 안팎으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정통 장로교 총회의 결의나 성명서처럼 용어 사용이 불가함을 인식하고 다른 좋은 말로 대체하여 사용함이 옳을 것이다.
6. 중보기도는 카톨릭적, 성공회적 발상이다
원래 카톨릭에서 신부의 위치는 메디아 코트릭스(협동 중보자)이다. 죄인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게 막고, 앉아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중보자 역할을 가로채는 것이다. 고해성사가 바로 그것이다. 카톨릭 신도들은 하나님께 직접 죄의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대신 신부에게 고해하면 "네 죄를 사하노라" 그러면 신자들은 죄가 사해진다고 믿도록 가르친다. 따라서 기도도 하나님께 직접 하지 못하고 성인들의 이름으로 간접적으로 한다. 카톨릭 신도들은 죄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 직접 나가서 기도할 수 없다고 세뇌되고 그 결과 중간에 성인들을 통해서 한다. 물론 신부들도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대신 기도해 주는데 이런 것을 중보기도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직접 나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지성소의 휘장을 찢어주셨는데 이제 그들은 성도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성공회도 중간쯤 개혁한 교회라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매우 희미하다고 본다. 한국에서 개신교를 어지럽히는 이런 용어들을 남발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대천덕신부이다. 예수원이나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런 실수를 똑같이 범하고 있다. 그의 신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불신자, 혹은 다른 사람들의 중보자로 착각하면서 중보기도를 한다. 이는 전적으로 무지의 소산이고, 신학적으로 매우 잘못된 용어이다. 하루 속히 이런 잘못된 흐름을 막아야 하며 생각 없이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분들은 바른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7. 중보기도 용어는 비성경적이므로 사용을 중지해야 한다.
1) 예장 합동총회 신학부는 총회 산하교회에 중보기도’ 용어는 비성경적이므로 사용을 중지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예장합동총회 신학부(하구봉 목사)는 제4위원회(중보기도)를 열고 전국교회 에 이 용어의 사용을 중지하라는 공문을 발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공고문은 “성총회의 결의와 정신에 따라 총회 산하 각 지교회에서는 즉시 ‘중보기도’라는 용어의 사용을 중지하고 성경에 있는 대로 합심기도(마18:19), 도고의 기도(딤전2:1), 이웃을 위한 기도(살전5:25), 청원기도(골4:3)등으로 사 용해 주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하였다.
2) 예장 고려고신총회는 제55회 정기총회에서 ‘중보기도’ 용어사용 금지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고려총회는 성명서에서 “최근 한국 교계에 ‘중보기도’가 만연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사람이 사람을 위해 하는 중보기도는 불가능하며 오직 예수님에게만 사용될 수 있는 용어임”을 강조했다. 사용 불가 사유에 대해서는 성경말씀을 인용해 “중보 혹은 중보자는 유일무이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전용” 되며, “전 성경에서 구속론적 의미에서 사람에게 중보 혹은 중보자란 이름이 사용된 곳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종교개혁이후 개신교 특히 개혁주의 교회에서 사람이 중보기도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중보기도권이 사용됨은 중세의 로마카톨릭 교리가 부활함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고려총회는 대안 책으로 “성경에 입각해 ‘~대신 기도’, ‘~위하여 기도’, ‘~함께 기도’ 등의 용어를 사용할 것”을 덧붙였다.
3) 통합측 한국장로신문에 중보기도에 대한 칼럼에 총회 용어 위원회 전문위원(숭실대교수)이 불가하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기독교 용어해설32> 2002. 7/6. p9 "중보"(仲保)의 사전적 뜻풀이는 "두 사람사이에서 일이 성사되도록 주선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고 죽은 일" 또한 "중보자"의 뜻 풀이는 "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 예수를 이른다"고 되어 있다.기독교서회편 "그리스도교 대 사전"에서도 "중보자"에 관하여 "결정적인 화해자로서의 중보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역할을 맡은 분이 하나님이며, 인간이신 그리스도이며 그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즉 유일회적인 희생제물이 됨으로써 영원한 화해가 이루어졌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로 주장하고 있는데 반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모마리아 역시 중보자라는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다." 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딤전2;5,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하여 예수님만이 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중보자라고 할 때는 위의 뜻풀이와 동일하게 , 또한 성경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예수님을 가리킨다. 또한 중보기도는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중보기도란 이처럼 예수님께만 해당하는 기도다. 다시 말하면 중보기도란 중보자(예수님)가 하는 기도란 뜻이며 중보자(예수님)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기도라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우리는 이 중보기도의 뜻을 확실히 알고 이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요즈음 교회 안에서 중보기도란 말을 사용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되는데 그 의미는 "이웃"을 위한 기도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이웃만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을 중보기도라 부르면서 중보기도모임, 중보기도회 같은 이름도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에서 중보자 예수님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하는 기도가 중보기도임을 분명히 안 이상 이웃을 위해서 예수님이 아닌 우리가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기도를 할 자격이 없다. 다만 예수님 이름으로 그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 이웃을, 때로는 특정한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이웃을 위한 기도"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우리가 감히 할 수도 없는 중보기도라는 말을 써야 하는가?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는 "주기도"라고 한다면 같은 맥락에서 중보자(예수님)가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을 우리는 중보기도라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우리들의 기도를 중보기도라 부르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4) 예장(개혁연합)총회의 헌법에 있는 대요리문답 제36~42문에 보면 예수님의 중보사역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도 우리 총회 산하 교회 안에도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훼손할 소지가 있는 중보기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 속히 시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8. 맺는 말
칼빈의 기독교 강요(김문제역,세종문화사,1977) p443 제12장-14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분과 성육신, 그리스도가 육신을 취하심, 중보자의 두 성품이 한 위격을 이룬다고 하였다. 제12장에 보면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직분을 다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어야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1). 중보자가 하나님과 동시에 인간이 되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시기 위해서 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려면 참 하나님도 되고 참 인간도 되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한 아무도 화평을 되찾기 위한 중보자 역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다(딤전 2:5)라고 하였다.
2). 중보자는 진정한 하나님과 진정한 인간이 되어야 할 이유로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시켜 줌으로서 인간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에게로, 지옥의 후사들을 하늘나라의 후사로 옮겨 주시기 때문이다.(요14;6) 3).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어야 할 이유로 중보자는 신성에다 인성을 결합하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한 편의 연약함을 죽음에 순복시켰고 또 다른 한편의 힘을 가지고 죽음과 겨루어서 우리를 위하여 승리를 획득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 중 어느 하나라도 박탈해 버리는 자들은 결국 그의 존엄과 영광을 훼손하고 그의 자혜(慈惠)를 몽롱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 기독론 p234에 보면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 시킬 중보의 자격은 성경에 명시한다고 되어있다. 중보의 자격에 대하여 살펴보면
1) 그는 반드시 사람이실 것이라 하였다.
그리스도가 천사의 성질을 취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인성을 취해 입으신 이유는 그가 우리 인류를 구속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갈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 그는 반드시 무죄하실 것이라 하였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일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벧전2;22-24,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3) 그는 반드시 신적 인격이실 것이다.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이러라.
요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위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한 것이요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거나 개인의 기도를 부탁받아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말 할 수는 없고 다만 “합심기도” “개인기도” “부탁기도” “청원기도” 라는 단어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에만 사용되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소위 요즈음 말하는 타인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 라 함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직 중보 사역을 약화시킬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타인을 위한 기도를 이웃을 위한 기도, 또는 남을 위한 기도라고 말함이 합당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내가 중보기도를 해 준다”라고 말을 하면 이 말은 마치 자기가 중보자라는 오해를 받기 쉬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중보자, 또는 중재 직을 약화 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중보기도 한다.”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신앙 상 좋을 것 같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시므로 예수님만 중보기도를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