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휘장(마가복음 15:38)


성소 휘장(마가복음 15:38)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말입니다.

“신약은 구약의 뿌리에서 나온 줄기이다.
신구약은 성도의 영적 성장의 두 유방이다.
두 유방 중에서 어느 하나만 갖고는 원만한 성장을 할 수 없다.”

휘장에 대한 기록은 출애굽기 26:1∼6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찌니.
2. 매 폭의 장은 이십 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3.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하고. 
4. 그 앙장의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5. 앙장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앙장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대하게 하고.
6.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앙장을 연합하여 한 성막을 이룰찌며.   

  
휘장은 전체를 10폭으로 만들었습니다.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게 하여 두 막이 한 휘장이 된다.
각 막의 길이가 28규빗, 넓이 4규빗이며 그 막 위에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었다.

첫째, 성막의 용어

성막(聖幕)(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찌니.

법막(法幕)(역대하 24:6)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장막(帳幕)(출애굽기 36:37)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장막 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  

회막(會幕)(레위기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증거막(證據幕)(출애굽기 38:21)
성막 곧 증거막을 위하여 레위 사람의 쓴 재료의 물목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모세의 명대로 계산하였으며. 

둘째, 성막의 구조

바깥 뜰, 성소(聖所), 지성소(至聖所)

바깥뜰은 이방인의 뜰 이라고도 합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바깥뜰에서는 온갖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장소라고 하겠으며 이곳에서는 사죄의 은총을 경험할 수 없는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휘장(揮帳)

휘장을 만든 재료는 네 가지 색깔의 실입니다.
네 가지 색깔은 “가늘게 꼰 베실(흰색), 청색, 자색, 홍색”이었습니다.

휘장의 크기는 전체 10폭으로 만들었고,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어 두 막이 한 휘장이 됩니다.
각 막의 길이가 28규빗(42피트), 넓이가 4규빗(6피트)입니다.
마지막 폭 가에 청색 고리 50, 금색 고리 50을 달아 연결하여 한 휘장으로 만들었다.

휘장의 문양은 그룹들을 수놓아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휘장의 견고성은 휘장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말 열 마리를 당길 때에도 전혀 찢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고고학자들은 설명합니다.

넷째, 휘장의 영적 의미

휘장을 만든 재료로 사용된 네 가지 색깔은 주님의 성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늘게 꼰 베실(흰색)은 주님의 성결(거룩, 의, 영광)
청색은 하늘의 색으로 주님의 나라(신성)
자주색은 주님의 위엄(존귀)
홍색은 피의 색으로 주님의 능력(권세)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0∼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휘장은 그리스도의 몸(肉體)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십자가와 휘장(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당시 휘장을 연구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휘장의 견고성은 말 열 마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 갈 때에도 찢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사람의 힘으로 쉽게 찢을 수 없을 정도의 견고성을 의미합니다.

왜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는가?
휘장의 용도는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지성소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의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의 피를 언약궤 위에 뿌리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를 흘리셨을 때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첫째, 예수님의 성품

휘장의 네 가지 색깔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을 찾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으로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세력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사자와 같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으로 송아지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섬김을 위하여 오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섬겨서 주님 편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인자의 복음으로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복음으로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 먹을 것을 찾아 순식간에 내려올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원수 사탄의 먹이로 잡혀가는 인생을 찾아내어 구원의 길로 끌어내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둘째, 영적인 삶의 회복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므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아무 때나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환난과 고통이 많은 세상에 머물고 있지만 열려진 하늘 문을 향하여 신령한 은혜를 기도하며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승리의 삶을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시작은 돌같이 굳어버린 내 마음의 반석이 쪼개져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4∼6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베드로전서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로마서 1: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셋째, 오직 예수

휘장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었던 것처럼 나 같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호세아 13:4
그러나 네가 애급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애급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권적인 역사로 나온 이후에 다시 애급과 같은 세상에서 주의 백성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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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휘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막(聖幕)”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성막(聖幕)이란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도록 이동하기에 편리한 구조로 만들어진 “장막(帳幕, Tent)”을 말합니다.

성막의 “길이 45피트”, “넓이 15피트”, “높이는 25피트”로 이동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성막의 구조는 “바깥뜰” “성소(聖所)” “지성소(至聖所)”로 구분합니다.

“바깥뜰”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합니다.
이방인의 뜰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에서는 “사죄의 은총이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온갖 범죄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성소(聖所)”


“지성소(至聖所)”




성소 휘장(揮帳)이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마치 커튼 또는 연극 무대에 설치하는 막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휘장(揮帳)(출애굽기 26:31∼33)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놓아서, 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 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첫째, 휘장을 만드는 재료와 색깔(출애굽기 26:31)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놓아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심지어 외부 출입을 금지하므로 남미 콜롬비아에서는 서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에 다양한 색깔의 깃발을 창문에 걸고 있다고 합니다.

붉은색 깃발은 “배고픔을 호소하는 신호”
검은색 깃발은 “가정 폭력을 겪고 있다는 신호”
파란색 깃발은 “의료지원이 필요하다는 신호”
다양한 색깔의 깃발이 상징하는 것은 사회 시스템이 부실하다는 증거라고 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한편 요한계시록에서 인을 뗄 때마다 다양한 색깔의 말이 등장합니다.

첫째 인을 뗄 때는 흰말이 등장합니다. 흰말은 거짓 선지자를 상징합니다(계 6:1∼2). 둘째 인을 뗄 때는 붉은 말이 등장합니다. 붉은 말은 전쟁을 상징합니다(계 6:3∼4). 셋째 인을 뗄 때는 검은 말이 등장합니다. 검은 말은 기근을 상징합니다(계 6:5∼6). 넷째 인을 뗄 때는 청황색 말이 등장합니다. 청황색 말은 죽음을 상징합니다(계 6:7∼8).

이와 같이 색깔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휘장은 네 가지 색깔의 실로 짜서 만든 것으로 네 가지 색깔의 실을 사용하여 만들었습니다.

청색은 하늘의 색으로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성품인 생명과 영광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결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자색은 그리스도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존귀와 권세를 상징합니다.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순종과 겸손을 상징합니다.

둘째, 휘장에 새겨진 그룹들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놓아서.

그룹이란 천사를 말합니다. 지성소의 휘장에는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 그룹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해 파송되었습니다.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천사는 직책에 따라 4 종류로 나뉩니다.

첫째,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수호하는 천사(창세기 3:23∼24)
둘째, 스랍은 하나님 보좌 주위에서 수종 드는 천사(이사야 6:2, 6)
셋째,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다니엘 8:16, 9:21, 누가복음 1:19, 1:26)
넷째, 미가엘은 영적 전투를 맡은 천사(다니엘 10:21, 12:1, 유다서 1:9, 요한계시록 12:7)

휘장에 그룹을 수놓게 한 것은 지성소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천사로 지키게 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지키는 천사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지성소의 휘장에 그룹이 수놓아진 것은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피를 흘리고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의 길을 여셨음을 말씀해줍니다.

셋째, 휘장의 영적 의미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합니다(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십자가와 휘장(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당시 휘장을 연구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휘장의 견고성은 말 열 마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 갈 때에도 찢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사람의 힘으로 쉽게 찢을 수 없을 정도의 견고성을 의미합니다.

왜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는가?
휘장의 용도는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지성소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의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의 피를 언약궤 위에 뿌리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를 흘리셨을 때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첫째, 예수님의 성품

휘장의 네 가지 색깔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을 찾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으로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세력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사자와 같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으로 송아지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섬김을 위하여 오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섬겨서 주님 편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인자의 복음으로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복음으로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 먹을 것을 찾아 순식간에 내려올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원수 사탄의 먹이로 잡혀가는 인생을 찾아내어 구원의 길로 끌어내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둘째, 영적인 삶의 회복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므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아무 때나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환난과 고통이 많은 세상에 머물고 있지만 열려진 하늘 문을 향하여 신령한 은혜를 기도하며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승리의 삶을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로마서 1: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셋째, 오직 예수

휘장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었던 것처럼 나 같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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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구조를 사람에 비유하여 “지성소는 영”, “성소는 혼”, “뜰은 육”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조각목으로 입힌 네 기둥의 갈고리에 늘어뜨렸습니다.

휘장의 견고성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 휘장은 1cm 정도의 두께로 말 열 마리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동시에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휘장이라고 합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세 개로 구분합니다.
밖에서 성막의 뜰로 들어가는 입구
성막의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제사하고 물두멍에서 씻은 후에 들어가는 성소의 입구
마지막의 지성소의 입구 즉 휘장을 말합니다.

첫째 입구는 성막의 뜰로 들어가는 곳으로 누구든지 들어가서 제사할 수 있습니다. 
둘째 입구는 성소로 들어가는 곳으로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 입구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1차씩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야만 가능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휘장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지성소의 휘장에는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 그룹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해 파송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의 죽음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지고,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는 하나님이 그것을 찢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이 휘장은 두께가10cm 이상으로 양쪽에서 열 마리의 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리며 찢으려 해도 찢어지지 않는 견고한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찢을 수 없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고고학자들이 증언합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막혀버린 인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으로 온 인류를 위한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심으로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모든 막힌 담을 허물어주시고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를 화목시켜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단번에 다 이루셨다!(Once for all)

히브리서 9:25∼28,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양의 피로백성의 죄를 사함 받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로는 예수의 보혈을 믿음으로, 양의 피가 없이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소망을 향한 영혼의 닻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견고하게 심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그 보좌 우편에서 우리 삶의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소망은 결코 흔들릴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에베소서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조각목이 금으로 입혀져 견고하고 튼튼한 성소의 기둥이 되기까지는 켜지고 벗겨지고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온전히 붙들려 쓰임을

받은 위대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나갈 때 우리가 교회의 지체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전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전을 지키며 주님오심을 기다린 안나와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도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좌로부터 임하는 소망(Hope), 평강(Peace), 사랑(Love), 그리고 기쁨(Joy)이 우리의 삶속에 충만히 넘쳐나기를 간절히 기도드리며 다시 한 번 우리의 믿음과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첫째 단계, 이방인의 뜰, 아직도 성막 바깥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둘째 단계, 성전의 뜰입니까?
셋째 단계 성소 안입니까?
넷째 단계 지성소까지 담대히 들어갈 수 있습니까?”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상징

휘장 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속죄피를 가지고 1년에 1차씩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히브리서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에 대한 예언적 상징입니다(히브리서 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히브리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by a new and living way opened for us through the curtain, that is, his body.)   

* 산 길 - living way
* 휘장 - curtain

휘장이 찢어진 것은 지성소의 문이 열린 것(마태복음 27:50∼52, 마가복음 15:37∼38, 누가복음 23:45)

마태복음 27:50∼52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마가복음 15:37∼38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누가복음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죄인들입니다(로마서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단번에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 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어지고 예수님이 이루신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성격을 믿는 자는 사죄와 칭의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를 하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여주는 표징

출애굽기 26:31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놓아서.

휘장은 가늘게 꼰 베실(흰 세마포)에 로 짜서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를 놓은 것입니다. 그 색깔들은 전에 출입문을 강해할 때 이미 말씀 드린 대로 한결 같이 오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 줍니다.

청색은 생명과 영광을 상징(요한복음 3:13, 31, 고린도전서 15:47)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이는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λογοs)로서 육신(σαρξ)을 입고 오셨다는 선언을 생각게 합니다(요 1:1, 14, 마 27:43, 빌 2:6).

자색은  권세와 존귀를 상징

그리스도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세와 존귀를 나타냅니다(삿 8:26).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악령과 죽음과 질병을 물리치신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마 27:38, 28:18).
홍색은 순종과 겸손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순종과 겸손을 나타냅니다(계 7:14). 이는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모습과 죽기가지 복종했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마 11:29, 빌2:8).


흰색은 성결과 순결

흰색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결과 순결을 나타냅니다 (계 19:8, 20:11). 이는 그에게 죄가 없으시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요일 3:5).

네 가지 색깔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각 다른 시각(핵심은 같지만)에서 기록한 4복음서와 잘 대조되기도 합니다.

자색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제시하는 마태복음(사자복음)
홍색은 예수님을 고난 받는 종으로 제시해 주는 마가복음(송아지복음)
흰색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제시해주는 누가복음(사람복음)
청색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는 요한복음(독수리복음)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돕는 하늘의 천사들도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참조 / 에스겔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우리들도 네 가지 색깔이 의미하는 성품을 점점 이루어 가도록 해야 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첫째, 예수님의 성품

휘장의 네 가지 색깔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을 찾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으로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세력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사자와 같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으로 송아지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섬김을 위하여 오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섬겨서 주님 편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인자의 복음으로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복음으로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 먹을 것을 찾아 순식간에 내려올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원수 사탄의 먹이로 잡혀가는 인생을 찾아내어 구원의 길로 끌어내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둘째, 영적인 삶의 회복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므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아무 때나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환난과 고통이 많은 세상에 머물고 있지만 열려진 하늘 문을 향하여 신령한 은혜를 기도하며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승리의 삶을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로마서 1: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셋째, 오직 예수

휘장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었던 것처럼 나 같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 찬송 / 큰 영화로신 주

1. 큰 영화로신 주 이 곳에 오셔서 이 모인 자들로 주 백성 삼으사 그 중에 항상 계시고 그 중에 항상 계시고 큰 영광 나타내소서

2. 이 백성 기도와 또 예물 드림이 향내와 같으니 곧 받으옵소서 주 예수 크신 복음을 주 예수 크신 복음을 만백성 듣게 하소서

3.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돌 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구원하신 능력을 주 구원하신 능력을 늘 끝날까지 주소서

4. 주 믿는 만민이 참도를 지키며 옛 성도들 같이 주 찬송 하다가 저 천국 보좌 앞에서 저 천국 보좌 앞에서 늘 찬송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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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聖殿)이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더 이상 성막과 같은 이동하기에 편리한 성구(聖具)가 아니라 반영구적인 건축물이 필요하므로 건축한 거룩한 처소를 말합니다.

성전은 역사적으로 몇 단계를 거쳐 세워졌습니다.

제1성전 : 솔로몬 성전
제2성전 : 스룹바벨 성전
제3성전 : 헤롯 성전
제4성전 : 에스겔 성전

제1성전 - 솔로몬 성전

Tabernacle)의 발전 형태로서 하나님께서 백성안에 거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처소였다. 한편 백성 중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은 훗날 제 2 위 하나님으로서 인간 가운데 직접 거하러 오신 예수님의 예표였다.스라엘 역사상 성전은 세 번에 걸쳐서 세워졌다. 솔로몬 성전(B.C. 959; 왕상 6:1-38), 수룹바벨 성전(B.C. 516; 스 6:15-18), 그리고 신약 시대의 헤롯 성전(B.C.20-A.D. 63)이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이런 성전들은 다 무너졌다. 하나님의 상징적 임재 처소인 성전이 무너질 때마다 이스라엘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놀랄 일이 못되었다. 왜냐하면 돌과 쇠로 만든 건물 자체가 하나님이나 아니면 하나님의 처소였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순종할 때만 하나님이 그속을 당신의 처소로 삼아 주신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요 우리 주님의 사역의 예표이며 그 흥망의 역사가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이스라엘 성전의 역사를 함께 모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솔로몬 성전

B.C. 959년, 예루살렘의 모리아산(Mount Moriah) 위에, 수 십년의 준비와 7년의 공사로 이스라엘 역사상 제 1성전이었던 솔로몬 성전이 준공되었다(열왕기상 6:1∼38). 이 성전은 B.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제 3차 침공 때 완전히 훼파되었고, 성전의 금, 은, 놋기명과 보물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졌다.  

제2성전 - 스룹바벨 성전

이스라엘 역사상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은 B.C. 586년 솔로몬 성전이 함락된 후 B.C. 516년 건축한 것으로서 옛 성전에 비해 크게 초라했다. 또한 포로 귀환 이후 바사(persia) 식민지 상태에서 건축한 것으로서 학개서에도 언급되었듯이 그 과정에 우여 곡절이 많았다. 또한 B.C. 167년 중간사 시대에 헬라인들에게 크게 모독 당하기도 했었다. 

제3성전 - 헤롯 성전

이방인인 이두매(Idumea) 출신인 헤롯은 유대인들에 대한 유화 정책으로 헤롯 성전을 건축하였다. 옛 성전 터전위에 B.C. 20년에 착공하여 외형은 9년 만에 완성되었으나 세부공사는 A.D. 63년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한편 예수님은 헤롯 성전을 가리켜 이것을 무너트리면 3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 처소의 상징에 불과한 헤롯 건물 자체를 가리키신 것이 아니라 그 건물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자체이신 당신을 죽이면 삼 일만에 다시 사실 것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었다(요한 2:19).

거의 80년 동안 세워진 헤롯 성전은 그 성전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결과 그저 죽은 건물로 존재하다가 A.D. 70년 완공된 지 불과 수년 후에 영원히 함락되고 만다. 

현재 통곡의 벽은 서쪽 벽으로만 남아있다.




성막은 땅 사방에 나무기둥을 박아서 천으로 둘러싼 것입니다. 성막을 장막(텐트)으로 지은 이유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이스라엘 백들은 광야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의 크기가 얼마인지를 모세에게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의 문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성막 뜰이 있고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성막 안으로 들어갑니까?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막 뜰에만 머물며 “나 예수 믿고 구원 얻었다. 그러니까 천당은 당연히 가게 되어 있다. 적당히 살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2).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것입니다.

성막 구조는 신앙 성장의 5단계를 보여 줍니다.

1단계 번제단 : 칭의의 구원.

성막 뜰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번제단이 나옵니다.
번제단은 바비큐를 굽는 석쇠처럼 생겼습니다.
피를 뺀 양이나 소, 염소 같은 제물을 번제단 위에 놓고 태웁니다. 제물을 태울 때 성냥불로 불을 붙이지 않습니다. 번제단의 불은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불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 강림을 불이 내려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늘에서 불이 자주 내려왔습니다.
증거를 요구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는 젖은 염소 고기를 바위 위에 올려놓게 하고 불을 붙여 완전히 태우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성막 뜰로 들어가서 번제단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임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의 구원입니다. 내가 원해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요 성령님이 감동시켜서 믿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온 불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재물을 태우면 하나님이 제물을 흠향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2단계 물두멍 : 회개.

번제단을 지나면 놋쇠로 만든 물두멍이 있습니다.
물두멍은 ‘씻다’라는 뜻입니다.
성소에 들어가려면 물두멍에서 반드시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씻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왜 손과 발을 씻을까요?
이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제일 먼저 회개가 터져 나옵니다.

3단계 떡상 : 말씀.

성막 앞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면 먼저 떡상이 있습니다.
떡상은 생명의 떡을 상징합니다.
매일 아침에 따뜻한 떡을 가져다 놓고 저녁에 물립니다.
떡상은 바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다음에는 성소로 들어가 떡상에서 날마다 말씀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먹지 않는 사람은 성소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먹을 때는 지식의 말씀밖에 보지 못합니다.

4단계 등대 : 기름.

떡상 옆에는 등대가 있습니다.
신선한 올리브를 돌로 으깨서 얻은 기름으로 성소의 불을 하루도 빠짐없이 밝히도록 했습니다.

등대는 바로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달아 성령님의 기름으로 날마다 삶을 밝혀야 합니다.

5단계 향단 : 기도.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두꺼운 휘장 바로 앞으로 나가면 향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향단은 성도들의 기도를 뜻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기도의 향기를 올려드릴 때 비로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는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의 말씀을 넣어 둔 법궤가 있고, 법궤 위에는 두 천사가 날개를 펴고 지키고 있습니다. 그곳을 ‘시은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이곳에 뿌립니다.
우리가 나아갈 곳은 여기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나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 자료출처 / 성막의 구조






성전이란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반영구적인 건축물로 지은 거룩한 장소를 말합니다.

제1성전은 솔로몬 성전
제2성전은 스룹바벨 성전
제3성전은 헤롯 성전
제4성전은 에스겔 성전







 

첫째, 하나님의 거룩성 수호를 상징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이 휘장은 성소 뒤에 있는 지성소를 가리기 위함이요 누구든지 지성소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짐승의 속죄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히 9:7).

일반 제사장들까지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들어가면 즉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대제사장이라도 하나님이 명한 규례를 지키지 않은 채 들어갈 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사역을 위해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죽어도 그 시체를 가지고 나오기 위해 다른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대제사장이 그 곳에 들어갈 때는 발에 끈을 묶고 들어갔습니다. 그가 죽을 경우 들어가지 않고 줄을 당기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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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6: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 휘장 안 지성소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이유는 그 곳에는 하나님 자신이 임재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죄인들과 교제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보면 죽였습니다(출 19:2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로 하여금 그 지성소를 지키게 했습니다. 31절에 보면 그 휘장에 그룹을 수놓게 했습니다. 그룹은 천사를 가리킵니다.

천사는 직책에 따라 4 종류로 나뉩니다.

첫째,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수호하는 천사(창세기 3:23∼24)
둘째, 스랍은 하나님 보좌 주위에서 수종 드는 천사(이사야 6:2, 6)
셋째,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다니엘 8:16, 9:21, 누가복음 1:19, 1:26)
넷째, 미가엘은 영적 전투를 맡은 천사(다니엘 10:21, 12:1, 유다서 1:9, 요한계시록 12:7)

휘장에 그룹을 수놓게 한 것은 지성소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천사로 지키게 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지키는 천사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막 안에는 성소와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한 휘장이 있었습니다(33). 

지성소는 법궤와 속죄소(시은좌)가 있는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아무나 이곳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지성소였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은 휘장에는 날개달린 천사인 그룹들을 수놓게 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할 때 하나님이 저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했습니다(창 3:24). 휘장에 수놓은 그룹들이 바로 제사장들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휘장은 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기도 하는데(히 10:20), 복음서에 보면 이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겨지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휘장이 찢겨졌다 했습니다(막 15:38).  십자가에서 휘장 되신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계신 은혜의 보좌(시은좌, 속죄소)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히 4:16). 

성소의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기 위하여 치어진 막이다. 
원래 “휘장”이라고 번역한 “카타페타스마”란 말은 페르시아 말 “파르고트”란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늘의 궁창과 땅의 궁창을 구분하는 벽을 말합니다.

성소에 안쪽에 분향단의 바로 뒤에 휘장이 쳐 있고, 휘장 안에는 법궤가 모셔진 지성소라고 합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소는 매우 거룩한 곳이다. 그래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도 함부로 지성소를 들여다보거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휘장으로 가리웠던 것이다. 만약에 함부로 인간이 지성소를 들여다보거나 들어갔다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막이다. 휘장은 하나님을 만나 뵙기 위한, 마지막 관문과 같은 것이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은 일 년에 한 번씩 출입하는 대제사장만이 열고, 들어 갈 수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 년에 대 제사장에 의해, 한 차례만이 이 휘장을 열리고, 대 제사장이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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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은 겉으로 보기엔 해달의 가죽이 덮힌 볼품없는 모습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서면 사방의 벽이 황금으로 되어 있고, 천장이 청색, 자색, 홍색, 흰색 실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황금의 집입니다.   믿음의 참 가치, 예수 그리스도의 참 가치는 성소에 들어선 자들만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 받침 위에 세워진 성막은 이 땅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세워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휘장되신 자신의 몸을 찢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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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6:19-20에 보면, 바벨론에 빼앗겼던 법궤(안약궤)가 유다 땅 벧세메스에 도착했을 때 유다 사람들이 그 안을 들여다 보다가 70명(5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법궤가 온전한지 그 안에 들어있는 율법판이 제대로 있는지 보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법궤는 하나님 임재의 표상으로서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한 성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안전을 확인한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침범한 죄가 되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수3:4, 민4;15, 출19:24).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의 성성(聖性)을 지켜 나가십니다.

  


사무엘하6:6-7에 법궤가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아비나답 집에 20년 동안 있다가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사건이 있습니다. 법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하여금 끌게 하고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 마당쯤 왔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붙잡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상15:13). 법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한 것도 잘못이나 웃사가 법궤를 붙잡으려는 것이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당신이 친히 책임지시는데 붙잡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친히 세워 나가시고 지켜 나가십니다 (계2:1). 우리는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수3:4, 민4:15 참조).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이 다스리는 곳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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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구조와 구속사적 의미


   <성막의 출처>

  성막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직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양식을 받아 지은 성전입니다 (출24:18, 25:1-9).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짓게 한 것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막의 정확한 칫수와 무게와 재료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여러 장(章)을 할애한 것은 단순히 성막의 건축 내용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과 천국의 실체와 성도의 생활 모범을 제시하기 위한 모형(표호)입니다 (히8:5, 9:23-24).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을 알게 하고 그와 영적 교제를 하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기위해 주신 표징입니다.

  


   <성막의 위치>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은 구름기둥(하나님의 임재)의 인도를 따라가다가 구름기둥이 멈추면 그 곳에서 멈추고 진(陣)을 칩니다(야영). 맨 중앙에는 성막을 치고 성막을 중심으로 한 주위는 레위 자손이 진을 치고  동쪽에는 유다에 속한 지파들이(유다,잇사갈,스블론), 남쪽에는 르우벤에 속한 지파들이(르우벤,시므온,갓), 서쪽에는 에브라임에 속한 지파들이(에브라임,므낫세,베냐민), 북쪽에는 단에 속한 지파들이(단,아셀,납달리) 진을 칩니다(민2:3-35, 계21:12).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다시 진행을 하는데, 그 때는 ①유다 진기(陣旗) ②르우벤 진기 ③성막과 레위 진기 ④에브라임 진기 ⑤단 진기 순으로 진행을 합니다. 그러다가 구름기둥이 멈출 때는 다시 그 곳에 진을 치는데 그 때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막을 중심으로 십자가 형태로 진을 칩니다.

<성막의 제원>

  성막 외부를 두룬 세마포 휘장의 전체 길이는 출애굽기27:18에 보면 장(長)과 광(廣)과 고(高)가 각각 100×50×5규빗 (50×25×2.5m)입니다. 참고로 1규빗은 45.6㎝인데 편의상 50㎝로 계산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출27:17에 보면 휘장을 세우는 기둥은 남쪽(좌)과 북쪽(우)이 각각 20개씩이고 서쪽(뒤)과 동쪽(앞)이 각각 10개로 되어 있습니다(성막은 동쪽을 향하고 있음- 계7:2 참조). 거기에 은으로 만든 가름대와 갈고리 그리고 놋으로 만든 받침으로 휘장을 고정했습니다. 그리고 동쪽(앞)에는 50규빗(25m) 너비의 10개 기둥 중 중간부분 20규빗(10m) 너비의 4개 기둥에는 출입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A. 출입문 (출27:16-19)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는 짐승(생축)을 이 곳으로 끌고 들어가 제사를 드리므로 죄 사(赦)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었습니다 (히9:22). 그러기에 성막 동편 끝에 있는 이 출입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죄사함을 받을 수도 없고 영적 자유함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a.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출입문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오늘날 이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14:6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고, 10:9에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했고, 사도행전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라고 했고, 로마서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막은 흰 세마포로 둘러져 있기 때문에 사방 어느 곳에서도 눈에 띄며 다른 천막들과 대조를 느끼게 합니다. 이는 그 내부의 순결과 거룩함을 암시해 줍니다. 성막 전체를 두르고 있는 휘장(세마포장)과 출입문 휘장의 높이는 2.5m입니다. 지나는 사람들은 이 휘장들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것들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모릅니다. 성막 안에 있는 진귀한 성구들과 제사하는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임재와 이스라엘 백성이 죄용서 받음을 모릅니다.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거룩과 순결과 평안을 느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둘려진 세마포장과 출입문에 수놓아진 색과 문양을 보고 느낄 뿐입니다. 그런데 출입문의 4색깔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내용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입문은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위한 문이기는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존재와 언행과 삶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게 하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 문은 어느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도록 20규빗(10m)이나 되게 넓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은 항상 열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곳으로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남녀노유, 빈부귀천, 지위고저, 학식유무를 무론하고 누구든지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께 나아오기를 원합니다. 이는 기본회개의 의미든 중복회개의 의미든 모두에 다 적용됩니다. 요한복음7:37-38에는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라고 했고 (사55:1), 누가복음14:21에는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잠1:20-21, 계22:17). 고린도전서1:26에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자이든, 병든 자이든, 괴로운 자이든, 외로운 자이든, 번뇌하는 자이든, 근심하는 자이든, 불화한 자이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아무리 보리 떡 같고 막대기 같고 고자와 같은 자라도, 소를 몰던 자요 뽕나무를 기르던 자요 고기를 잡던 자라도 쓰임 받게 됩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보여 줍니다.

  출입문은 4기둥에 휘장을 가로질렀는데 그 휘장은 청색과 홍색과 자색과 가늘게 꼰 베실(흰색)로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 색깔들은 한결같이 오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 줍니다. '청색'은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성품인 생명과 영광을 나타냅니다 (요3:13,31, 고전15:47). 이는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λογοs)로서 육신(σαρξ)을 입고 오셨다는 선언을 생각게 합니다 (요1:1,14, 마27:43, 빌2:6). '자색'은 그리스도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세와 존귀를 나타냅니다 (삿8:26).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악령과 죽음과 질병을 물리치신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마27:38, 28:18).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순종과 겸손을 나타냅니다 (계7:14). 이는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모습과 죽기가지 복종했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11:29, 빌2:8). '흰색'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결과 순결을 나타냅니다 (계19:8, 20:11). 이는 그에게 죄가 없으시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요일3:5).


  이 4가지 색깔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각 다른 시각(핵심은 같지만)에서 기록한 4복음서와 잘 대조되기도 합니다. '자색'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제시하는 마태복음(사자복음)에, '홍색'은 예수님을 고난받는 종으로 제시해 주는 마가복음(송아지복음)에, '흰색'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제시해주는 누가복음(사람복음)에, '청색'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는 요한복음(독수리복음)에 잘 어울리는 색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돕는 하늘의 천사들도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4:7).

 

    



 B. 번제단 (출27:1-8)

  번제단은 5×5×3규빗(2.5×2.5×1.5m)의 크기입니다. 그리고 조각목을 상자처럼 짜서 그 겉에 놋으로 입혔습니다. 그리고 그 단 가운데는 제물을 잘 타게 하고 타고난 재가 아래로 잘 빠지게 하기 위해 그물처럼 생긴 놋 망을 가로질러 넣었습니다. 그리고 단 양편에는 놋 망을  반 중간에 고정시킬 뿐아니라, 단을 이동시킬 때 안전하고도 손쉽게 메고 갈 채(봉,pole)를 끼울 수 있도록 놋 고리를 만들어 달았습니다(25:13, 38:5). 그래서 이 번제단을 토단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20:24)

  



 a.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줍니다.

  번제단은 우선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공의'는 죄에 대해 벌하고 의에 대해 상을 주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생축(짐승)을 데리고 와서 머리에 안수를 통해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전가시킨 다음, 제사장들이 생축을 잡아 번제(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때에 사용되는 단입니다. 이때 번제로 드려지는 생축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이 죄값을 치루기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에 생축을 사람 대신 죽게 한 것입니다. 로마서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고, 히브리서9:22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레17:14). 하나님께서 이런 율법을 내신 것은 그가 얼마나 죄에 대해 미워하시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곧 공의로운 성품을 알게 합니다. 그 공의의 법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그리스도까지 죽였습니다 (벧전2:24, 롬6:10).


  번제단은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랑의 성품도 함께 보여 줍니다. '사랑'은 죄행대로 갚지 않고 긍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번제단에 드려지는 생축은 사람의 죄를 대신 전가받아 죽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사람이 죽어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사람 대신에 짐승으로 죽게 하고 사람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법을 내신 것은 그가 얼마나 택한 백성을 사랑하는지 알게 해줍니다. 그 사랑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게 한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영 단번에 속죄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히10:4, 9:11-12).

  



 b.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번제단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시도 하지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주임을 나타내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이 번제단에서 드려지는 생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므로 우리 죄값으로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만족시켜 줄 것을 예표하는 표징입니다 (히9:11-12, 22, 10:4,11).


  번제단의 재료와 모양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되어 있습니다(1절). '조각목'(아체이 싯딤, שטים עצי -BHS, shittim wood -KJV, acacia wood -NASB, NIV, RSV)은 단단하고 내구력이 강한 나무로서, 광야의 혹독한 역경 가운데서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는 아카시아 나무와 비슷해서 좋은 목재로는 쓸 수 없고 화목(火木)으로나 쓸 수 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나무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인성(人性)을 가지셨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사53:3). 시편 기자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라고 예언했습니다 (시118:22).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나사렛의 한 촌에서 살았습니다.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 사셨으며 침 뱉음과 능욕을 당하고 가시관과 창과 못에 찔려 그의 생명을 십자가상에 죽음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the son of man).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연약성을 체휼하시기 위함입니다 (히4:15). 



  c.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짠 다음 불에 타지 않도록 놋을 입혔습니다 (2절). 그리고 번제단에는 부속 기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물에서 떨어지는 통, 제물의 재를 통에 담는 부삽, 제물에서 떨어진 피를 담는 대야 (24:6), 번제단에서 취한 불씨를 분향단에 옮기는데 사용하는 불 옮기는 그릇 (30:7-8, 37:23, 레16:12, 민16:46, 4:9), 잘려진 제물(고기)를 단 위에 골고루 펴는데 사용하는 고기 갈고리 (상상2:13) 등이 있습니다. 그 부속물들도 모두 불에 타지 않도록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3-7절).



  민수기16:35-39에 보면, 향로를 가지고 불의의 제물을 드리려 했던 고라당 250인이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의 불에 타 죽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향로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지만 향로는 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향로가 놋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타지 않고 뜨거운 열도를 통과한 향로를 두둘겨 쳐서 번제단을 싸게 했습니다.



'놋'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상징합니다. 특히 그의 죄없으신 의를 상징합니다. 진노의 심판의 불에 견디려면 신성 특히 죄가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 죄가 있어서 죄값으로 내려진 형벌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법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 천사라도 그 진노의 벌을 이겨낼 자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심판을 견디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만이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4:15, 요일3:5).

 



  d.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번제단 네 귀퉁이에는 제물(생축)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묶는데 사용하기 위해 뿔을 만들었습니다 (2절, 시118:27). 열왕기상1:50-53에 보면 솔로몬이 아도니아를 죽이려 하다가 그가 이 제단의 뿔을 잡는 것을 보고 살려 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이 제단의 상징 의미를 알고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뿔'은 권세와 능력의 상징입니다 (단8:3-20, 삼상2:10). 번제단의 뿔은 죄로 인해 죽게 된 자를 살리는 권세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은 죄로 죽을 자를 살리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과 보혈을 믿는 자에게는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구원의 뿔"이라고 했고 (시18:2), 사가랴도 예수님을 "구원의 뿔"이라고 찬양한 것입니다 (눅1:69). 우리는 그 구원의 뿔을 붙잡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권세가 삶 속에서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도록 적용해야 합니다.




 

     C. 물두멍 (출30:17-21)

  성막의 출입문을 지나 뜰로 들어가면 맨 먼저 번제단이 있고 그 다음에 물두멍이 있습니다. 물두멍은 다른 기구들과 달리 유일하게 크기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물두멍은 제사를 위한 제물을 씻거나 제사장들이 성소 봉사의 직분을 수행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근동지방은 건조한데다가 바닥이 사막 모래 땅이므로 먼지가 많기 때문에 손과 발이 더럽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성소 사역을 하기 전에 매 순간 더럽혀진 수족을 씻어야만 했습니다.

  



 a.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상징합니다.

  한편 물두멍은 성막 기구 중 유일하게 그 규격과 물의 양이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른 기구에서 규격과 양을 기록한 것 만큼이나 물두멍에서 그것들을 기록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해주신 죄가 한없다는 것을 생각게 합니다. 조직신학에서 인간의 죄를 나눌 때 원죄와 본죄로 나눕니다. 원죄에는 정죄(죄책)와 유전죄(오염)가 있고 본죄는 자범죄와 요구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종류의 죄를 다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 현재에 지은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시103:12, 사1:18). 하나님의 용서가 한이 없으십니다.  



  매일 삶 속에서 지은 죄가 어떤 죄이든, 얼마나 큰 죄이든 상관없이 그 죄를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 주셨음을 확인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에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용서를 나타내십니다 (마18:24-35). 큰 마태복음18:22에서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가르치신 주님의 한없는 용서의 마음이 느껴지게 합니다.




   b. 성도에게 성결을 요구하는 표징입니다.

  물두멍은 제사장의 수족을 씻고 제물을 씻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사역을 하는 제사장도 거룩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거룩하기를 원합니다. 물두멍의 물의 양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씻어야 할 일이 많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불가불 매 순간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단의 역사가 맹렬하고 세속 문화와 문명이 유혹하고 육체의 부패한 성품이 끊임없이 죄를 짓게 하기 때문에 육체의 연약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항상 불결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날마다 씻는 일이 필요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결케 해 나가야 합니다. 에베소서5:26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요15:3, 17:17, 딛3:5). 말씀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활 가운데 계명 어긴 자범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 요구죄까지 회개해야 합니다 (롬14:23, 약4:17, 삼상12:23, 요일1:8). 물론 타인의 죄에 대한 정죄가 아닌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마7:1-5, 약2:13). 그럴 때 우리에게는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됩니다 (롬5:20, 6:1).

  



c. 성도에게 변화와 헌신을 요구하는 표징입니다.

  물두멍은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출애굽기38:8에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고 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놋(구리) 거울을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출애굽할 때에 가지고 나왔던 거울을 물두멍 만드는 데에 바친 것입니다. 그 거울이 전에는 자신들의 육신의 더러워진 모습을 보여 주고 멋을 내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옛 성품 곧 허영과 욕심과 교만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던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울을 바친 것은 옛 성품과 습관과 풍습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인 것입니다. 여인들은 성막에서 봉사를 하면서 성막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전무하는 제사장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을 것이고 자신들이 제사장 사역을 도와 봉사할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의 수족을 씻는 기구를 만들기 위해 놋(구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놋 거울을 기꺼이 바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상과 풍습과 습관과 욕망을 버립니다 (엡2:1-3). 물욕과 정욕과 사욕을 버립니다 (요일2:16).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깁니다 (빌3:8). 외모를 꾸미지 않고 속 사람을 단장합니다. 곧 온유하고 안정된 심정을 가지려 합니다 (벧전3:3-4).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게 되면, 그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면, 자신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중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들을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활용하는 것입니다 (고후8:1-3). 특히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영육 간에 도와주는 일에 자기의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갈4:15).



 

     D. 등대 (출25:31-40, 37:17-24)

  성막의 출입문을 지나 뜰로 들어가면 번제단과 물두멍을 맞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성소가 있는데 그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있는 것이 등대(燈臺)입니다. 등대는 밤에(저녁부터 아침까지) 등잔불을 켜서 성소 안을 밝히 비추는 역할을 하는 기구입니다(레24:3). 등대는 한달란트(34kg: 약 100근)되는 정금으로 쳐서 만들되, 밑판에 가운데 줄기를 세우고 거기에 4마디로 구분하고 꽃과 꽃받침과 살구꽃 형상의 잔을 각 마디마다 장식하고, 맨 위에 기름을 담을 등잔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6개의 가지를 만들어 거기에도 꽃과 꽃받침과 살구꽃 형상의 잔을 3개씩 달고 그 끝에도 등잔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운데 원 줄기에 가지가 좌우로 3개씩 연하게 하였습니다.



   a.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이 등대에는 인칭대명사(His- KJV)가 적용되었습니다. 곧 등대가 인격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인격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등대와 같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2:46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등대는 정금 한달란트(34kg: 약 100근)로 만들어졌는데 (39절), 주조가 아닌 단조로 만들어졌습니다 (36절). 곧 금물을 주형에 부어 만든 것이 아니라 공교한 금세공 기술로 쳐서(두둘겨서) 만든 것입니다. 한달란트의 정금 자체가 귀하기도 하지만 침을 받으므로 더욱 값진 기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연상케 하는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값에 대한 진노의 형벌을 받으시므로 택한 백성을 구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교회를 탄생된 것입니다.




    b.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등대의 원줄기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등대의 가지들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1:20에 "~일곱 금촛대는 일곱교회니라"고 했습니다. 이 가지들이 원 줄기에 붙어 있듯이 교회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15:5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했고, 에베소서5:31-32에는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지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했고, 요한복음10:28에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실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고, 로마서8:35-39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했습니다.




   c. 성령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등대의 등잔(燈盞)은 매 줄기 끝마다 하나씩 달렸으므로 모두 7개가 됩니다. 그 등잔에는 순결한 감람유 기름을 두게 했고 저녁에서 아침까지 항상 불을 밝혀 놓게 했습니다 (레24:2-3, 27:21, 슥4:1-6).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靈)이신 성령께서 어떤 사역을 하시는지에 대해 상징으로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요한계시록4:5에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계3:1참조).



  첫째, 등잔은 등대의 모습을 비춰 주어 등대를 보게 해줍니다. 등잔이 상징하는 성령께서는 등대가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해줍니다. 성령의 별명인 '보혜사'(παρακλητοs)는 대언자, 변호자, 증거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름처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해 주고 변호해 주는 사역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성품과 사역을 알게 하고 그가 말한 모든 진귀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시인하게 하고 고백하게 합니다 (마16:16-17참조). 고린도전서12:3에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등잔은 등대의 맞은 편에 있는 진설병상(陳說餠床)과 그 위에 있는 진설병(차려놓은 떡)을 비춰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진설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진설병을 응식으로 먹는 일을 도와줍니다. 이 진설병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요14:6)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마4:4).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요14:16). 그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진리되는 모든 말씀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요6:48-59, 14:26, 16:13). 요한복음16:13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진리 안에서(εν τη αληδεια)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진리 안으로(ειs την αληδεια) 인도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λογs)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말씀을 적용(ρημα)하도록 도와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의지와 그 말씀을 지킬 때에 은혜를 느끼도록 감동시키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영적인 필요한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벧후1:19-21, 계2:7 참조).



  셋째, 등잔은 등대의 좌편(지성소 휘장 앞)에 위치한 분향단(焚香壇)을 비춥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분향단 사역을 할 때 도움을 받습니다. 분향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상징하는 동시에 (롬8:34)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시141:2). 요한계시록5:8에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기도하고자 하는 열의를 갖도록 감동시키시며,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에 대한 감동과 확신을 얻도록 도와주십니다. 로마서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벧전2:9, 계5:10).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말씀을 이해하게 하고 기도를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 전도, 봉사, 교제 등 모든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십니다 (요4:24, 행1:8).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아무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전 생활에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 분이 역사하실 수있도록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제사장이 금집게로 불똥을 떼어 내듯이, 성령을 근심케 하고 거역하고 소멸하던  불순종의  죄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뜻과 의지와 행동과 육체의 모든 의지가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 진설병상 (출25:23-30, 37:10-16)

   진설병상(陳設餠床)은 떡을 차려 놓는 상입니다. 크기는 2×1×1.5규빗(1×0.5×0.75m)이고 재료는 번제단이나 분향단이나 법궤와 동일하게 조각목으로 만든 후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상 사면에 테를 두루고 상 위에 놓은 떡이 떨어지지 않도록 상 언저리를 돌아가면서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었습니다. 또 이동시키기에 편리하도록 금고리 넷을 양 면에 부착하고 채(봉,장대)를 꿰어 두게 했습니다. 물론 그 채도 조각목으로 만든 다음 금을 입힌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담을 수 있는 대접과 분향하는데 사용하는 숟가락과 떡에 바르는 유향을 담을 병(甁)과(레24:7) 전제를 드릴 때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잔을 정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성소의 모든 기구와 그 부속물을 모두 정금으로 만들었고, 성소 사면을 모두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a. 예수님께서 영적 양식의 제공자임을 상징합니다.

  진설병상 위에는 항상 진설병을 두었습니다. 진설병(떡,陳設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생명의 제공자가 되실 것을 예표합니다. 요한복음6:35,48,58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뜻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떡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대표적 단어입니다. 그 떡을 먹는 자는 생명을 부여받게 되고 생명을 유지하므로 영원히 주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늘로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도 주리고 죽었지만, 그것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먹은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요6:48-51, 고전10:1-5). 신약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이것을 알게 해주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요6:1-35). 그 떡을 먹는 방법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요6:53-58).  



  예수님이 구원과 영생을 주기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진설병은 곱게 간 고운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발라 익힌 것입니다. 익히는 방법은 화덕에 굽기도 하고 번철에 부치기도 하고 솥에 삼기도 합니다 (레2:1-10). 이 고운 가루는 곡식 열매가 찧음을 받으면서 빻아지고 부서져서 만들어집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의 제물로 바쳐질 것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큰 고난으로 제물로 올려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에 노출되어 잘 구워진 떡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거절과 핍박을 통해 제물이 되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부서지는 듯한 경험과 갈보리 산상에서의 타는 듯한 경험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과 영생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b.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진설병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로서 내린 양식 곧 만나를 먹게 한 것은 사람이 육신의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8:3).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제공받아야 합니다.

 


첫째, 누룩과 꿀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떡에는 누룩과 꿀이 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레2:11, 6:16). 누룩과 꿀은 죄성과 외식 곧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갈5:9, 고전5:6, 눅12:1, 막8:15, 마16:12).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인본주의가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고전1;17, 렘6:16, 출20:25, 요4:24). 순수한 복음을 받기를 원하며 순수한 말씀을 받기를 원합니다 (고전5:7-8).

 


둘째, 매 안식일마다 새로 갈아야 합니다. 진설병(떡)은 매 안식일마다 새로 갈고 물리게 했는데, 그 물린 떡은 제사장과 그의 후손들이 거룩한 회막 뜰에서 먹었습니다 (레24:8-9). 우리는 매 주일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특히 죄성과 인본주의가 섞이지 않은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갓난 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을 얻어 먹으려 해야 합니다 (벧전2:2).

 


셋째, 회막 뜰에서 먹어야 합니다. 진설병은 제사장들이 회막뜰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고 했습니다 (레24:9, 6:16). 그 시간은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교제하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설병이야말로 교제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교제의 기초는 진설병이어야 합니다. 모든 교제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은 구원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그를 위한 희생과 고난이 화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로 인한 은혜를 나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교제만이 참된 교회(εκκλησια)를 이룰 것입니다.

 



  c. 성도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진설병은 2줄로 6개씩 12개가 올려졌습니다 (레24:6). 그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거둔 곡식을 모두 바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치므로 생명의 떡이 되어줄 것처럼 이스라엘도 자신들을 온전히 바치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물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롬12:1).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 속에서 연단받은 인격과 변화된 생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한 쪽은 익지 않은 제물을 원치 않습니다 (호7:8). 연단된 인격과 변화된 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을 통해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고운가루처럼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떡이 되는 것입니다.

 

   


  F. 분향단 (출30:1-10, 37:25-29)

  분향단의 재료는 조각목으로 만들어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크기는 1×1×2규빗(0.5×0.5×1m)으로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졌으며 사면에 뿔을 연하게 하고 금테를 두르고 양편에 두 고리를 만들어 조각목에 정금을 입힌 채(봉)를 꿸 수 있게 했습니다. 위치는 성소에서 제일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진설병상과 금촛대 사이에 있는 동시에 언약궤와 속죄소의 바로 맞은편 휘장 앞에 있습니다.

  


 a. 예수님의 중보사역를 예표합니다.

  분향단은 향을 피우는 곳입니다. 제사장들이 매일 등불을 끌 때와 켤 때에 향을 사르는 곳입니다 (7-8절). 그 향연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와 속죄소 앞에서 올라갑니다. 이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밤낮 쉬지 않고 기도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치르므로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했습니다 (행9:14). 그리고 우리를 위해 매일 관심을 가지시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행7:55). 또한 우리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34에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롬8:26).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못했을지라도 우리를 변호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요일2:1).

  


b. 성도에게 기도를 요구하는 표징입니다.

  분향단 향연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5:8에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시편141:2에도 "나의 기도가 주의 분향함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보좌에 향처럼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듣는 것처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잡혀 간 이방에서도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한 것처럼 (겔11:16), 어느 곳에서 어떤 형편에서 기도하든지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분향단이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언약궤와 속죄소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것처럼 (25:22, 30:6), 성도의 기도 생활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생활입니다.

 


 첫째, 향은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릴 향을 자기가 냄새를 맡을 목적으로 만들면 백성 중에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37~38절). 우리의 기도 목적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해서는 안됩니다. 기도의 목적을 알게 합니다. 자기를 많은 사람에게 높임을 받기 위해 하는 외식하는 기도도 옳지 못합니다 (마6:5-7). 또한 구하는 내용이 자기를 위한 것이어도 안됩니다.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마6:25-33, 약4:3). 

 


 둘째, 향을 사를 때는 하나님이 지시한 재료와 방법대로 만든 향만 사용해야 합니다. 다른 향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9절). 34~36절에 보면,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을 동일한 중수로 달아 거기에 소금을 치고 곱게 찧어 만들도록 했습니다. 소합향은 눈꽃 모양의 꽃이 피는 키가 작은 나무 껍질에서 채취한 향품이고, 나감향은 바닷 속의 연체 동물 덮개 딱지에서 만든 향품이고, 풍자향은 지중해 연안의 다년생 초본 식물의 줄기에서 채취한 향품이고, 유향은 감람나무과에 속한 나무에서 채취한 진액으로 만든 향기로운 향품입니다. 이러한 향기로운 향품으로 향을 만들게 한 것은 아마 성막에서의 희생 제물로부터 나오는 여러 냄새와 주위에 뿌린 피 냄새를 제거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금을 넣은 것은 향품을 굳게 하는 역할을 하거나 위생적 목적을 위해 넣게 한 것 같습니다. 기도의 방법을 알게 합니다. 모든 기도의 기초와 근거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구약에 나답과 아비후가 번제단(구속의 기초)에서 취한 불이 아닌, 여호와께서 취하지 아니한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임 당한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레9:24~,10:1-2). 그리고 성경말씀을 근거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는 근거를 말씀의 약속에 두어야 하며 말씀에 맞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말씀에 맞지 않는 것은 구해도 주시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주술적 의미를 가진 습관적인 기도도 옳지 못합니다 (마6:5-7).

 



셋째, 향은 등불을 정리할 때와 켤 때 살라야 합니다. 향은 등불을 정리할 때와 켤 때 사릅니다 (7-8절). 이는 아침과 저녁을 가리킵니다 (27:20-21). 기도의 시기를 알게 합니다. 기도할 때 만물을 접하기 전 새벽에 기도로 시작하여 일을 마친 후 저녁에 기도로 하루를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꼭 아침 저녁 하루에 두번 하라는 의미보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3번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단6:10).

 



 넷째, 향은 아침 저녁으로 매일 피워야 합니다. 향은 아침 저녁으로 매일 피워서 향불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8절下). 기도의 기간을 알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문제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신자된 의무입니다 (삼상12:23). 그런 다음에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 특별 기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기도도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정한 때까지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눅18:1-8, 겔36:37). 우리에게 기도할 제목이 있다면 항상, 그리고 그 내용이 응답될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 10:12-14에 보면, 다니엘이 21일 동안 작정기도를 했을 때 21일째 되는 날에 기도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향단은 1년에 1차씩 아론이 속죄피를 뿔에 바르므로 정결케 했습니다(10절).



성도는 가끔씩 특별기도 기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상적인 기도가 아닌, 그리스도의 속죄를 생각하며 자신의 본질적인 죄를 깊이 회개하는 특별기도 기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나 국가적으로도 특별기도가 필요합니다. 미스바 부흥 운동과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 운동이 좋은 예입니다. 또한 개인의 중대한 문제를 두고도 특별기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핍박 문제를 두고 히스기야는 국가적 위기와 질병 문제를 두고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21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고, 느헤미야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모르드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금식하며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도 성역을 앞두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특별기도를 했고,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적 호흡입니다. 잠시라도 중단하면 우리 영혼은 생명력을 잃고 마귀에게 지게 됩니다. 한시도 깨어 기도하지도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26:40). 그리고 항상 깨어 기도하라 베드로를 통해 주신 권면을 깊이 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벧전5:8). 기도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생명력이자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능력입니다 (막9:29).

 

     


 G. 휘장 (출26:31-33)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 두 방을 나누기 위해 휘장을 만들었습니다. 이 휘장은 흰색 베실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 형상의 수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조각목으로 입힌 네 기둥의 갈고리에 늘어뜨렸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 휘장은 4지 폭의 두께로서, 말 10필로 양쪽에서 동시에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는 휘장이라고 합니다.

  


a. 하나님의 거룩성 수호를 상징합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이 휘장은 성소 뒤에 있는 지성소를 가리기 위함이요 누구든지 지성소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짐승의 속죄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히9:7). 일반 제사장들까지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들어가면 즉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대제사장이라도 하나님이 명한 규례를 지키지 않은 채 들어갈 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사역을 위해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죽어도 그 시체를 가지고 나오기 위해 다른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대제사장이 그 곳에 들어갈 때는 발에 끈을 묶고 들어갔습니다. 그가 죽을 경우 들어가지 않고 줄을 당기기 위함이었습니다.

  


레위기16:2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휘장 안 지성소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이유는 그 곳에는 하나님 자신이 임재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죄인들과 교제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보면 죽였습니다 (출19:24).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로 하여금 그 지성소를 지키게 했습니다. 31절에 보면 그 휘장에 그룹을 수놓게 했습니다. 그룹은 천사를 가리킵니다. 천사는 직책에 따라 4 종류로 나뉩니다. 첫째,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수호하는 천사이고 (창3:23-24), 줄째, 스랍은 하나님 보좌 주위에서 수종드는 천사이고, 셋째,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이고, 넷째, 미가엘은 영적 전투를 맡은 천사입니다. 하나님이 이 휘장에 그룹은 수놓게 한 것은 지성소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천사로 지키게 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사무엘상6:19-20에 보면, 바벨론에 빼앗겼던 법궤(안약궤)가 유다 땅 벧세메스에 도착했을 때 유다 사람들이 그 안을 들여다 보다가 70명(5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법궤가 온전한지 그 안에 들어있는 율법판이 제대로 있는지 보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법궤는 하나님 임재의 표상으로서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한 성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안전을 확인한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침범한 죄가 되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수3:4, 민4;15, 출19:24).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의 성성(聖性)을 지켜 나가십니다.

  


사무엘하6:6-7에 법궤가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아비나답 집에 20년 동안 있다가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사건이 있습니다. 법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하여금 끌게 하고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 마당쯤 왔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붙잡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상15:13). 법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한 것도 잘못이나 웃사가 법궤를 붙잡으려는 것이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당신이 친히 책임지시는데 붙잡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친히 세워 나가시고 지켜 나가십니다 (계2:1). 우리는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수3:4, 민4:15 참조).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이 다스리는 곳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상징합니다.

   휘장 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속죄피를 가지고 1년에 1차씩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히9:7).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에 대한 예언적 상징입니다 (히9:11-12). 이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히10:19-20). 그래서 이 휘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마27:50-52, 막15;37-38, 눅23:45).

  우리는 다 본질적으로 죄인들입니다 (롬3:10). 하나님께 나아갈 수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려 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지고 예수님이 이루신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3:12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성격을 믿는 자는 사죄와 칭의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를 하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심지어 외출을 금지하므로 남미 콜롬비아에서는 서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에 다양한 색깔의 깃발을 창문에 걸고 있다고 합니다.

붉은색 깃발은 “배고픔을 호소하는 조난 신호(SOS)”
검은색 깃발은 “가정 폭력을 겪고 있다는 신호”
파란색 깃발은 “의료지원이 필요하다는 신호”
다양한 색깔의 깃발이 상징하는 것은 사회 시스템이 부실하다는 증거라고 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성소의 휘장은 흰색, 청색, 홍색, 자색과 같은 네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습니다. 휘장의 색깔은 무슨 의미일까?

청색은 하늘의 색으로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성품인 생명과 영광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결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자색은 그리스도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존귀와 권세를 상징합니다.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순종과 겸손을 상징합니다.


c.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31절에 보면 휘장은 가늘게 꼰 베실(흰 세마포)에 로 짜서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를 놓은 것입니다. 그 색깔들은 전에 출입문을 강해할 때 이미 말씀 드린 대로 한결같이 오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 줍니다.

 


첫째, 청색은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성품인 생명과 영광을 나타냅니다 (요3:13,31, 고전15:47). 이는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λογοs)로서 육신(σαρξ)을 입고 오셨다는 선언을 생각게 합니다 (요1:1,14, 마27:43, 빌2:6).

둘째, 자색은 그리스도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세와 존귀를 나타냅니다 (삿8:26).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악령과 죽음과 질병을 물리치신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마27:38, 28:18).

셋째,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순종과 겸손을 나타냅니다(계7:14). 이는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모습과 죽기가지 복종했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마11:29, 빌2:8).

넷째, 흰색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결과 순결을 나타냅니다 (계19:8, 20:11). 이는 그에게 죄가 없으시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요일3:5).

  이 4가지 색깔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각 다른 시각(핵심은 같지만)에서 기록한 4복음서와 잘 대조되기도 합니다. 자색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제시하는 마태복음(사자복음)에, 홍색은 예수님을 고난받는 종으로 제시해 주는 마가복음(송아지복음)에, 홍색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제시해주는 누가복음(사람복음)에, 청색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는 요한복음(독수리복음)에 잘 어울리는 색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돕는 하늘의 천사들도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4:7에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라고 했습니다(겔1:10참조).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우리도 이 4가지 색깔이 의미하는 성품을 점점 이루어 가도록 해야 합니다.




 

     H. 언약궤 (출25:10-16)

  언약궤는 증거궤, 법궤라고도 합니다. 언약궤는 2.5×1.5×1.5규빗(1.2×0.7×0.7m)의 크기로 조각목으로 만들어 정금을 입혔습니다. 위로 돌아가면서 금테를 둘렸고 양편에 두 금고리를 만들어 채(봉)를 꿰어두게 했습니다. 물론 이동할 때 쓰는 그 채도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성경에는 성막기구 중 언약궤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언약궤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열왕기상8:9과 역대하5:10에 보면 언약궤 안에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9:4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모세의 두 돌 비석(율법판)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학자들은 원래 세가지 물건이 다 들어있었는데 이스라엘이 언약궤(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 (삼상4:17), 두가지 물건은 없어지고 두 돌판만 남았다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궤 안에는 처음부터 두 돌판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법궤가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에 하나님은 그 법궤를 스스로 지켰습니다. 법궤가 이동되는 곳마다 재앙을 내려서 유다로 돌아오게 했고 또 유다의 벧세메스 사람들도 그 법궤를 열어 보다가 적어도 70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상5:1-8, 6:19). 그런 정황을 볼 때 만일 법궤 안에 세가지 물건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 물건을 잃어버리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율법판만 언약궤 안에 두게 했고 (출25:21) 만나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궤 안에 두라 하지 않고 궤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출16:33-34, 민17:10). 그런데도 히브리서에서 세 종류가 다 안에 있었다고 한 것은 사실 여부에 관심보다는 언약궤와 관련하여 표징으로 보관되었던 물건들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무엇을 예표하느냐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우리에게는 그것들이 궤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의도대로 그 세 종류의 물건들이 언약궤와 관련되어 있고, 그것들이 예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직분된 표호들입니다.

  



a. 예수님의 본질을 알게 하는 표징입니다.

  첫째,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었습니다 (10절). "조각목"(히. 싯딤 아체이, shittim wood -KJV)은 단단하고 내구력이 강한 나무로서, 광야의 혹독한 역경 가운데서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는 아카시아 나무와 비슷해서 좋은 목재로는 쓸 수 없고 화목(火木)으로나 쓸 수 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나무입니다 (신10:3).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인성(人性)을 가지셨음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연약성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예언했습니다(사53:2-3). 시편 기자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예언했습니다 (시118:22).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애굽의 망명생활을 했으며 나사렛의 한 촌에서 살았습니다.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 사셨으며 침 뱉음과 능욕을 당하고 가시관과 창과 못에 찔려 그의 생명을 십자가상에 죽음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연약성을 체휼하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라고 했습니다. 

 



둘째, 언약궤는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11절).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짠 다음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정금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그의 출처와 본질을 알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셨으나 근본적인 본질은 하나님이십니다. 미가 선지자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그의 근본은 태초에 만고에니라"고 했습니다 (미5: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요1:2-3). 바울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했고 (빌2: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했습니다 (골1:15-16). 예수님께서도 당시 유대인들과의 자기 증명에 관한 변론에서 자신을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던 자라고 선언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요8:51-58).

  



 b. 예수님의 직임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왕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16절에서 말한대로 두 돌판(율법판,증거판)이 있었습니다. 이 두 율법판은 모세가 두번째 받은 돌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율법판을 받아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왔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던져서 깨트렸습니다(출32:19). 그리고 다시 산에 올라가 전과 같은 내용의 두 율법판을 다시 받아 안약궤 안에 넣은 것입니다 (신10:2). 율법은 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율법의 정죄에 의해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의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율법의 정죄와 그 형벌을 이기시고, 죄사하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민수기17:8-11에 보면, 고라당을 중심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며 쳤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위해 12지파의 족장들의 지팡이를 언약궤 앞에 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아론의 이름이 적힌 지팡이에만 싹이 났습니다. 그럼으로서 하나님께서 레위지파의 족장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백성들이 죄를 지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므로 백성이 죄사함을 얻도록 중보 역할을 하는 직분입니다. 7월 15일 대 속죄일에 속죄 피를 가지고 지성소 언약궤 뚜껑의 속죄소 위에 피를 뿌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화목케 합니다. 그 대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히6:20).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없이할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시킬 수 있습니다 (요14:6, 행4:12, 고후5:18).

 



셋째, 예수님의 선지자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출애굽기16:33-3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이슬같이 만나를 내려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표징을 삼게 하려고 항아리에 한 오멜의 만나를 담아 언약궤 앞에 보관하도록 했습니다. 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고전10:3-4).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요6:35).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늘로서 내린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요6:49-50). 예수님은 하늘로서 와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었습니다. 또한 자신과 말씀과 표적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 관한 모든 진리를 나타내어 우리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c. 복음 사역 방법을 제시해주는 표징입니다.

  이스라엘이 진행할 때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이었던 이 언약궤가 가장 중심에서 갔듯이, 우리의 생활 중심이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의 현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전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출3:2-3, 고전1:27-2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생활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할 때 존귀해집니다. 진정한 존재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첫째, 언약궤는 채(봉)로 메고 가야 합니다 (13-14절). 언약궤는 레위 자손중 고핫 자손으로 하여금 어깨에 메고 가도록 했습니다 (민4:15). 수레에 싣거나 짐승으로 끌고 가게하면 안됩니다. 힘들어도 사람이 메고 가야 합니다. 사무엘하6:6-7에 보면 언약궤(법궤)를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아비나답 집에 20년 동안 있다가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사건이 있습니다. 언약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하여금 끌게 하고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 마당쯤 왔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붙잡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대상15:13). 웃사가 법궤를 붙잡으려는 것이 큰 잘못이지만,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식이 없는 수레나 이성과 영혼이 없는 소에 의해 섬김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으로서는 복음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성과 영혼이 있는 인간에게 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직분을 수행하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인격입니다. 바른 관계성입니다. 우리의 물질, 건강, 지식, 명예, 은사가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둘째, 채는 언약궤의 고리에서 빼지 않아야 합니다 (15절). 채를 언약궤에서 빼지 말고 항상 꿰어 두게 한 것은 하나님이 언제 이동을 명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동하면 즉시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군사로 말하면 항재전장의 정신, 임전태세의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을 시사합니다. 적은 무리라도 기드온 300명 용사와 같은 항재전쟁의 정신을 가진 정예군이 필요합니다 (삿7:4-6). 신명기20:5-6에는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행치 않은 자,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 여자와 결혼하고 그 여자를 취하지 못한 자, 두려워 하는 마음에 겁내는 자는 돌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후서 2:4에서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대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는 전투 정신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5;8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I. 속죄소 (출25:17-22)

  시은소(施恩所)라고도 하는 속죄소(贖罪所)는 정금으로 2.5×1.5규빗 (1.2×0.7m)의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속죄소는 언약궤의 뚜껑 역할을 하도록 언약궤 위에 올려 놓았는데, 그 위에는 정금으로 그룹을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a.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성격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21절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율법판)을 궤 속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언약궤의 사역만 있고 속죄소의 사역이 없었다면 이 은혜의 보좌는 한낱 소름기치는 무서운 심판의 보좌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율법판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율법판은 죄를 드러내어 정죄합니다. 죄성을 들춰 내어 더욱 반항심을 갖게 하여 죄를 더하게 하기도 합니다. 율법은 그것을 어기는 자에게 죽음을 선고합니다. 로마서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가 사람에게서 제거되고 사망의 법인 율법의 심판과 정죄에서 피할 수 있는 방도로 속죄소로 언약궤를 덮게 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여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게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죄값으로 이 율법의 선고에 의해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9:22).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무시무시한 공의의 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덮게 한 것입니다.

  



 b.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결과를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1년에 1번 있는 대속되일이 되면 대제사장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씻기 위해 휘장 안 지성소로 들어 갔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번제단에서 취한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 위에 1번 뿌리고 그 앞에 7번 뿌렸습니다. 번제단에서 죽은 흠없는 생축의 피가 속죄소에 뿌려지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사(赦)해졌습니다. 히브리서9:7에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 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죄사(罪赦)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어 그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히브리서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를 흘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함 받게 했습니다. 에베소서1:7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흰눈 같이 희어졌습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도말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과가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겨졌습니다.

 



둘째,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한 것입니다(갈3:13) 다시는 그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권세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롬8:33-34).

 



셋째,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했습니다. 요한일서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3:12에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마27:51). 그래서 22절의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게 된 것입니다.

  



 c. 구속사역에 대한 천사들의 경탄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18-20절에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라고 했습니다. 속죄소 위에는 그룹 천사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천사는 직책에 따라 스랍, 그룹, 가브리엘, 미가엘이 나옵니다. 그 중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천사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룹이 하나님의 위엄을 수호하는 직책을 갖고 있지만 (창3:24), 속죄소 위의 그룹은 속죄소 사역에 수종 드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룹들은 빈속한 순종을 위해 날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사6:2). 또한 서로 유기적 협력을 위해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겔1;11-). 그리고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 보좌에 있지만 (마18:10),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직접 도왔습니다 (마4:11, 28:2). 천사는 오늘날 성도의 구원 사역을 돕기도 합니다. 히브리서1;14에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고 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수종 들면서 예수님의 구속과 성도의 구원을 보면서 놀라고 감탄합니다. 베드로전서1:12에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43:19-20).

 


주님은 우리의 죄를 없이하고 하나님과 화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5:18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직책 곧 복음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고후9:16, 롬1:14, 행20:23-24). 또한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는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엡4:32, 마18:33, 마7:1-5, 6:14-15, 18:21, 약2:13). 속죄소가 언약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J. 지붕 (출26:1-14)

  성막의 지붕은 4겹의 덮개로 되어 있습니다. 그 덮개들은 안쪽에서부터 세마포 덮개(1-6절), 염소털 덮개(7-13절), 수양가죽 덮개(14절上), 해달가죽 덮개(14절下) 순으로 덮여 있습니다.

  


a. 예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지붕의 가장 안쪽에는 세마포 덮개로 덮었습니다 (1절). 28×4규빗(14×2m) 크기의 세마포를 10폭으로 만들어 서로 이어서 지붕으로 덮었습니다. 그 덮개는 가늘게 꼰 베실 (흰색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 형상의 수(繡)를 놓았습니다. 이 4가지 색깔과 그룹 천사의 형상은 출입문과 휘장에서도 살펴본 내용입니다. 첫째, 흰색은 그리스도의 무죄함과 순결하심과 의로움의 성품을 상징하고, 둘째, 청색은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기원의 성품을 상징하고, 셋째, 자색은 그리스도의 왕적인 권위와 영광의 성품을 상징하고, 넷째,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역의 성품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사람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누가복음에, 청색은 독수리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에, 자색은 사자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마태복음에, 홍색은 송아지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마가복음에서 각각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수종드는 천사의 성품에서도 나타나는 색깔들이기도 합니다 (겔1:10, 계4:7).

 


 4가지 색깔들로 공교하게 수놓아진 그룹들은 항상 성소와 지성소를 내려다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천사는 사역적 직책에 따라 4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스랍은 하나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수종들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시키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사3:6,6:2). 둘째,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수호하며 낙원 입구를 수호하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창3:24, 출25:18). 셋째,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직책을 가졌고 (단8:16, 9:21, 눅1:19,26, 행7:53, 갈3:19),



넷째, 미가엘은 이스라엘의 대적과 악령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단10:13,21,유9, 계12:7). 그런데 그룹 천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성소와 지성소에서 사역(봉사)하는 제사장 위로 날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제사장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자세입니다. 동시에 보호하려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뿐아니라 성도의 구원 운동도 도우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1:14에는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했고, 베드로전서1:12에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라고 했고, 시편34:6-7에는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2-3절에 보면 10폭의 세마포 앙장이 서로 연(連)하여 한 지붕을 이루었다고 했는데, 이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구원 운동을 돕기 위해 서로 연합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에스겔1:9,11-12에 "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고 했습니다.

 


또한 세마포 앙장이 서로 연(連)연한 것은 성도의 연합과 교회의 연합을 상징합니다. 에베소서2:21-22에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고, 4:16에는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連絡)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은사를 서로 연합하여 구원 사역을 이루어야 하고 (고전12:4-30참조), 교회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의 속죄를 타나내는 표징입니다.

  두번째로 덮는 덮개는 30×4규빗 (15×4m) 크기의 염소털 덮개입니다. 첫번째 덮은 세마포 덮개 보다 길이가 1m 정도 더 깁니다. 이 앙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러 오심에 대한 예언적 상징입니다. 레위기16:18-22에 보면, 아사셀의 염소에 대해 나옵니다. 대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이 염소 2마리를 잡아 한 마리는 제단에서 잡아 그 피를 제단 기초에 뿌렸으며 (요1:29), 한 마리는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한 다음 무인지경에서 광야로 돌려 보냈습니다. 그 염소는 다시 찾지도 않으며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과 그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도말해짐에 대한 완전한 상징적 의식이었습니다. 이사야1: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라고 하였고, 시편103:12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하였고, 예레미야31:34에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씻을 수 없는 많은 죄가 있습니다. 그것이 원죄(정죄,유전죄)이든 본죄(자범죄,요구죄)이든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셔서 모든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과 그 증후군들이 각종 결핍과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죄와 고난을 주님께서 법적인 의미를 뛰어 넘어 실제로 정복케 해주실 것을 고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c. 예수님의 대형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지붕의 세번째로 덮는 수양가죽 덮개는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서 비록 보이지는 않는 앙장이나 성막을 좀더 보호하기 위해 덮은 가죽이었습니다. 

  이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셔서 대신 형벌받으신 면을 예표합니다. 창세기3:21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 무화과 잎으로 엮어서  수치를 가리려 했으나, 하나님은 짐승의 가죽을 입혔습니다. 그 짐승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가리기 위해 대신 죽은 대속물(代贖物)이 된 것입니다. 아담이 죄로 죽어야 할 자리에 그 짐승이 죽어 아담의 수치를 가렸습니다 (롬6:23, 히9:22). 이 짐승은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친히 대속물이 되어 주실 것을 예표합니다 (행4:12, 요14:6).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오실 그리스도의 대형대속(代刑代贖)하실 것을 바라보게 하려고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창세기4:3-5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 곧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첫태생 수양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안받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습니다. 그것은 짐승의 피로 제사하는 것이 오실 그리스도의 대형과 대속의 음영(그림자)이기 때문이요, 짐승으로 제사하는 것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것은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가인의 제사가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안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레위기 2장에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2장에 나오는 소제(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항상 번제(짐승으로 드리는 제사)와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출29:40, 민15:1-10).



소제는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를 근거할 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열납 여부를 제물의 차이에 두지 않고 죄행에 두고 있습니다. 가인은 생활 가운데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아서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3:12에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인은 악한 자로서 행위가 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본문 다음 구절들에 보면 가인이 제사가 열납되지 못한 것을 보고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창4:6-7). 그래서 가인이 평소에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증거들은 가인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가 아니라 결과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곧 가인이 시기 분노하여 살인한 내용을 두고 한 말이지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22:13에 보면,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신 하나님은 이삭 대신 수풀에 걸린 수양을 잡아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수양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양을 잡아 제사하면서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죽어야 할 자리에서 한 수양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죽음(피흘림) 대신 짐승의 죽음(피흘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삭이 죽어야 할 자리에 수양이 대신 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실 대석자에 대한

음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53:5-6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대신 대형대속(代刑代贖)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d. 예수님의 인성를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성막 지붕의 맨 마지막 덮개는 해달의 가죽 덮개입니다. '해달'(海獺)은 각주에 물돼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나일강이나 홍해에서 떼를 지어 서식하고 있는 해양동물 곧 수달입니다. 이 동물은 광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물입니다. 아마 이 가죽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때 신발을 만들 구실로 가지고 나왔던 것  같습니다.

  해달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보여 주는 완전한 그림자입니다. 해달 가죽은 색상이 없고 약간 붉으스레한 회색의 우중충한 덮개입니다. 이 덮개는 매혹을 줄만한 가치나 볼품이 전혀 없었습니다. 덮개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전혀 기대하지 못하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맨 위에 덮여져 있기 때문에 해와 비와 폭풍의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외부 요인들로 인하여 혹독함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가면 사방이 정금으로 싸였고 베실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정교하게 수(繡)놓은 찬란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출입문을 지나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하여 성소로 들어간 자만이 볼 수 있는 진귀함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음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는 해달가죽 같습니다. 이사야53:2-3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했고, 마태복음13:55-57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 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유가 그의 외부적인 면만 보기 때문입니다 (요1;10-11).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서 미련하게 보일 뿐이요 거리끼는 것일 뿐입니다 (고전1:18,23). 하나님이 하시는 우리를 통해서 해 나가시는 진리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말씀을 공급받고 기도의 교통을 하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자는 그 보배로움을 압니다. 그 영적 아름다움은 받는 자만 아는 세계입니다 (계2:17). 그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삽니다 (마13:44).

  우리는 성막의 지붕 덮개를 생각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며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막의 구조와 영적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구원 계획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음영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과 헌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두멍의 놋도 여인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거울로 만들어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특히 본문에 나왔던 해달 가죽은  백성들이 신발을 만들어 신기 위해 가지고 나왔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으로 성막을 이루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섭리해 주셨습니다. 신명기8:4에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했고 (29:5), 느헤미야 9:21에도 "사십 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물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알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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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막의 구조와 구속사적 의미|작성자 크로스라이프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가복음 15:1∼47
♦ 묵상을 위한 주제 : 성소 휘장(38절)
♦ 성구 :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The curtain of the temple was torn in two from top to bottom.)

“성소 휘장(the curtain of the temple)”
구약 시대의 “성막(聖幕)”은 “성소(聖所)”와 “지성소(至聖所)”로 구분합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것을 “휘장(揮帳)” 이라고 합니다.
“휘장”이 상징하는 것은 “육체(肉體)”를 의미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20)

성소와 지성소를 연결하는 휘장은 대제사장이 속죄제 제물의 피를 들고 들어갈 수 있었듯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므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도 은혜의 통로를 향하여 힘차게 나갑시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사회적 거리를 믿음의 거리로 좁혀서 은혜의 보좌로 당당하게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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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聖殿)

성소(聖所)

성막(聖幕)


성전(聖殿)이란 “성스러운 전당 혹은 집”을 의미합니다.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이 대표적인 성전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건축물로써의 의미가 아닌 곧 성당이나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지 않고 인간의 몸을 “성령의 전”이라는 의미에서 성전이라고 부른다(고전 16:9).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또는 거룩한 성전(בית המקדש, 벳 하미크다쉬, 거룩한 집)은 예루살렘의 성전 산(하르 하바이트)에 있었다. 유대교의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의 “발등상”을 상징 한다(쉐키나).

제1성전 솔로몬 성전
솔로몬 왕이 기원전 10세기 즉 기원전 957년에 7년 동안 건축하였다.
고대 유대교회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이 성전은 모세의 장막과 실로, 노브, 기브온 장막을 대체한 것이었으며 유대교의 믿음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제1성전은 바벨론에 의해서 기원전 586년에 무너졌다.
새로운 성전의 건축은 기원전 535년에 시작되었다.
히아투스 후에 기원전 521년경까지 건축이 이루어졌으며, 516년 완성되어 515년 봉헌되었다. 
에스라서에 기록되었듯이 키루스 대왕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다리우스 대왕이 보수하였다.

제2성전 헤롯 성전
5세기 후 헤롯 대왕에 의해 기원전 20년경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이를 제2성전이라고 한다. 80년 유대 독립 전쟁이 진압될 때에 로마 제국에 의하여 무너졌으며, 흔히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서쪽 벽만이 남았다. 성전 바깥의 벽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이슬람 사원인 바위의 돔은 성전 터 위에 7세기 후반부터 서있었으며 알아크사 모스트도 비슷한 시기부터 성전 뜰 자리에 서 있었다.

제3성전 스룹바벨 성전
바벨론 포로 후 귀환하여 건축한 성전

유대교 종말론은 제3성전에 대한 예언이 있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이며 유대교 원리주의자 와 보수 유대교에서는 제3성전을 기다리고 있다.

2007년 8월 30일에 주택 단지에 파이프를 설비하다가 제2성전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2007년 10월에 고고학자들이 제1성전 유적을 확인하였다.









성소(聖所)

성막(聖幕)

성막(tabernacle, מִשְׁכַּן‎, mishkan, residence, dwelling place, 거주)은 출애굽부터 가나안 정복시기까지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하나님이 거주한 장소였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성막을 건설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약속의 땅을 정복한 후에 하나님의 거주하는 장소로서 솔로몬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440년 후에 건설되었다. 


성막의 구조

성막은 길이가 약 45.6m(100규빗), 폭이 약 22.8m(50규빗)인 뜰 가운데 세워졌고, 뜰 사면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이 휘장은 청동으로 만든 기둥 60개로 지탱되었다(출 27:9∼19).

뜰(마당) 안에는 번제를 위한 큰 제단이 있었고(출 27:1∼8), 제사장들이 제사를 위하여 자기 몸과 제물을 씻는 청동 물두멍이 있었다(출 30:17∼21). 뜰의 서쪽 끝에 세워진 성막의 성소는 목재 구조로 길이 약 14m(너비 1규빗 반의 판자 20개) 너비 약 4m(1규빗 반 되는 판자 6개를 나란히 놓은 폭)였으며, 두꺼운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였다(출 26:15∼30). 성소 지붕은 제일 안쪽(덮개)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 모양의 자수를 놓은 휘장으로 덮혀 있었고(출 26:1∼6), 그 바로 위에는 보온을 위해 염소털 휘장이(출 26:7∼13), 또 그 위에는 붉은 물들인 숫양 가죽이(출 26:14), 그리고 제일 바깥에는 방수를 위해 해달의 가죽(출 26:14)이 덮힌 4중 지붕 구조를 하고 있었다. 또 성소 내부에는 휘장 오른편에 진설병상, 휘장 왼편에 금등대, 그리고 휘장 바로 앞 가운데 분향단이 놓여 있었다(출 25장). 또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가 있는데 거기에는 오직 언약궤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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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과 성전의 차이


성막은 출애굽 때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동물의 가죽으로 된 것을 말한다. 성전은 솔로몬에 의해 돌과 나무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은 단 한 번, 단 하나만 존재하고, 성막을 솔로몬 이후 몇 번에 걸쳐 지어지고 개축된다. 성막은 텐트이기 때문에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구름이 움직이면 레위인들은 성막을 거두어 뒤 따라 간다. 구름이 멈춘 곳에 다시 성막을 설치한다. 그러나 성정은 건축물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 또한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 누군가는 성막이 진짜이고 성전은 가짜. 인간의 손에 의해 억지로 고정된 것으로 보지만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광야 시대는 옮겨 다녀야 했기에 성막이어야 한지만,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굳이 옮길 필요가 없으니 당연히 성전이 되어야 한다.

이곳에서 실제 성전뿐 아니라 상징적인 성전 또는 성막까지 포함해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Ⅰ. 역사적 성막 또는 성전


성전을 연구함에 있어 두 가지의 성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역사 속에 있었던 성전이고, 다른 하나는 상징 또는 환시 속에서의 상징이다. 역사 속이 성전은 광야 시대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이 있다. 헤롯 성전은 디토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1. 최초의 성막, 광야의 성막(B. C. 1446∼967)


최초의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지은 것이다. 내부와 주변은 천으로 되어 있고, 덮개는 해달 등의 가죽으로 되어 있다. 영어에서는 종종 텐트(Tent)로 번역한다. 성막은 다른 용어로 회막, 장막, 증거막, 법막, 여호와의 성막, 증거의 장막, 성소, 여호와의 집, 세상에 속한 성소로 불린다.


성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헬”은 원래 동물의 가죽이나 짐승의 털로 된 유목민들의 이동식 거주지인 천막을 말한다(창 9:21).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까지 존재한다.


2. 최초의 성전인 솔로몬 성전(B.C. 966∼586)

다윗은 성막을 보고 마음이 안쓰러웠다. 자신은 화려한 궁전에 살지만 하나님의 법궤는 초라한 장막 안에 있었다. 성전을 지을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막으신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을 알고 큰 복을 주신다. 소위 다윗 언약으로 불리는 언약인데, 후에 다윗의 후손들이 영원히 통치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것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완성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아닌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완성하신다. 다윗은 비록 자신이 성전을 짓지 못하지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한다. 자신의 가진 많은 재산을 헌납한다. 솔로몬은 최대한 화려하게 궁전을 짓고 성전을 짓는다. 이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이어진다.

 

3. 포로 후의 스룹바벨 성전(B. C. 716∼A. D. 70)

바벨론의 70년 포로가 끝나고 바사(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포로들을 귀환 시킨다. 자원하는 자들은 고곡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유다백성들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와 처음 한 일은 성전을 짓는 일이다. 에스라와 스룹바벨의 주도 하에 성전이 터가 놓이고 완성된다. 비록 중간에 주변의 방해로 13년 정도 정지 되지만 마침내 완성된다. 이 성전은 A.D. 70년 디토 장군이 예루살렘을 멸망 시킬 때가지 보존된다.


4. 헤롯 성전(B. C. 19∼A. D. 70)

헤롯 성전은 엄밀하게 새로운 성전이 아니다. 그럼에도 헤롯 성전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이전의 성전과는 차원이 다른 화려함과 웅장함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이두매인이었던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룹바벨 성전을 개증축하여 솔로몬 성전보다 더 크게 짓는다. 물론 화려함까지는 재정적인 부족으로 갖추지 못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성정을 가리키며 자랑할 만큼 거대하고 화려했다고 한다.


Ⅱ. 상징과 환시 속의 성전


1. 에스겔의 성전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하나님의 환상을 본다. 마지막 장면에 하나님의 성전이 새로 지어진다. 이 성전은 실제의 성전은 아닌 환상의 성전이다. 후에 완성될 성전을 환상을 통해 보여주신다. 대단히 상징적인 성전이다.

 

2.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고 죽을 때 죄목 중 하나가 자신을 성전이라 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성전으로 소개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막이 열리고, 예수님을 성전으로 소개한다.


3. 성전인 그리스도인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성전으로 부른다. 바울이 의도한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의미는 거룩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성전으로 삼고 그 안에 계시니 성전인 그리스도인의 몸을 함부로 더렵혀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후서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4. 성전인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의 성막이 내려온다. 또한 어린양으로 성전으로 소개한다. 이것은 어린양을 통해 성막의 기능이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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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크리스천포스트는 “짐 데니슨 박사”가 집필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성경구절”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소개했다.

다음은 주요 내용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두려움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하는 뉴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성경구절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위기 26:1)

이 구절을 읽으면서 성령께서 묵상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이 명령은 우리 삶과 세계의 모든 차원에 적용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서 이러한 성찰이 이 칼럼을 쓰게 했다.

우상 숭배와 무관함

레위기 26장 1절은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이 바알, 아스다롯, 몰렉, 그리고 다른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 사람들로 가득 찬 날과 분명히 관련 있었다.

이 구절이 우리와 어떻게 관련 있는가?

기독교 신학의 기초 원리 중 하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처음 영감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과 관련성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현재 우리의 삶과 문화에 신성한 진리를 말씀하며 권위를 갖는다(히브리서 4:12).

그러나 오늘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돌을 세우는 유혹에는 거의 직면하지 않는다.

성지로의 많은 여행에서, 유대 민족들이 명백한 종교적 우상 숭배보다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에 의해 더 유혹을 받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44년 동안 설교를 해왔지만 아직 물리적인 우상에 대한 설교하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과 영혼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와 관련성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또 다른 기본 원칙은 성경이 계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말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은 레위기 11장의 식이법을 따를 의무가 없다. (이것은 사도 행전 15장 28~29절에서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들은 원칙으로서 우리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을 돌보시고 우리가 그분의 영광과 선을 위해 먹고 살기를 원하신다.

마찬가지로 물리적 우상에 대한 레위기의 계율은 원칙으로서 매우 관련 있다. 우리의 삶과 영혼이 주님을 신뢰하고 섬기는 것보다 더 신뢰하고 섬기는 어떠한 것이 있다면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 우상은 물리적이고 영적일 수 있다.

몇 가지 예가 분명하다. 무언가 잘못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할 때, 그 죄를 우상으로 만든다. 반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된다"(야고보서 4:17).

다른 형태의 영적 우상 숭배는 덜 분명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 여러분을 더 기쁘게 하기 위해 이 칼럼을 쓰고 있다면 여러분을 나의 우상으로 만든 것이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보다 여러분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면, 내 자신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모든 사람이 ‘궁극적인 관심사’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이 주님이 아니라면 우리의 우상이다.

우상 숭배의 유혹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삶과 세상의 모든 차원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는 “무신론(atheism)”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많은 신들이 존재하며, 각각의 신은 적절한 곳에서 신뢰되고 섬겨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원주의(pluralism)”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에는 전쟁, 바다, 지혜 등의 신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주일 종교의 신과 월요일 세속주의 신처럼 훨씬 더 미묘한 방식으로 물려받았다.

우리는 구주께서 우리를 지옥에서 구해주셨으며 그분의 도움이 필요할 때 요청할 수 있다는 성경적 믿음의 유익을 알기 원한다. 그 분에게 감사의 응답으로 시간과 재정의 일정 비율을 기꺼이 드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제공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현대 세속주의의 이점을 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에서 일하는 한 이것은 우상적이지 않다. 그 분은 기독교인을 의사와 교사, 정치 지도자 및 학생으로 부르고 계신다. 그 분은 소금을 소금그릇에 숨겨두거나, 등불을 말 아래 두기 원하지 않으신다(마태복음 5:13~16).

그러나 우리가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주님이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레위기 26장 1절은 우리에게 시급히 관련이 된다.

다윗은 다음과 같은 선언을 자신의 약속으로 삼는 법을 배웠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편 20:7)

오늘 우상에게 유혹을 받고 있는지 보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병거와 말을 신뢰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만든 이를 신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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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성전 또는 성막의 역사와 종류

성막과 성전의 차이


성막은 출애굽 때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동물의 가죽으로 된 것을 말한다. 성전은 솔로몬에 의해 돌과 나무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은 단 한 번, 단 하나만 존재하고, 성막을 솔로몬 이후 몇 번에 걸쳐 지어지고 개축된다. 성막은 텐트이기 때문에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광대를 지날 때 하나님의 구름이 움직이면 레위인들은 성막을 거두어 뒤 따라 간다. 구름이 멈춘 곳에 다시 성막을 설치한다. 그러나 성정은 건축물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 또한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 누군가는 성막이 진짜이고 성전은 가짜. 인간의 손에 의해 억지로 고정된? 것으로 보지만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광야 시대는 옮겨 다녀야 했기에 성막이어야 한지만, 가나인에 정착한 후에는 굳이 옮길 필요가 없으니 당연히 성전이 되어야 한다.

이곳에서 실제 성전뿐 아니라 상징적인 성전 또는 성막까지 포함해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Ⅰ. 역사적 성막 또는 성전


성전을 연구함에 있어 두 가지의 성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역사 속에 있었던 성전이고, 다른 하나는 상징 또는 환시 속에서의 상징이다. 역사 속이 성전은 광야 시대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이 있다. 헤롯 성전은 디토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1. 최초의 성막, 광야의 성막(B.C. 1446∼967)


최초의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지은 것이다. 내부와 주변은 천으로 되어 있고, 덮개는 해달 등의 가죽으로 되어 있다. 영어에서는 종종 텐트(Tent)로 번역한다. 성막은 다른 용어로 회막, 장막, 증거막, 범박, 여호와의 성막, 증거의 장막, 성소, 여호와의 집, 세상에 속한 성소로 불린다.


성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헬은 원래 동물의 가죽이나 짐승의 털로 된 유목민들의 이동식 거주지인 천막을 말한다.(창 9:21)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까지 존재한다.


2. 최초의 성전인 솔로몬 성전(B.C. 966∼586)


다윗은 성막을 보고 마음이 안쓰러웠다. 자신은 화려한 궁전에 살지만 하나님의 법궤는 초라한 장막 안에 있었다. 성전을 지을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막으신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을 알고 큰 복을 주신다. 소위 다윗 언약으로 불리는 언약인데, 후에 다윗의 후손들이 영원히 통치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것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완성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아닌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완성하신다. 다윗은 비록 자신이 성전을 짓지 못하지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한다. 자신의 가진 많은 재산을 헌납한다. 솔로몬은 최대한 화려하게 궁전을 짓고 성전을 짓는다. 이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이어진다.

 

3. 포로 후의 스룹바벨 성전(B.C. 716∼A.D. 70)

바벨론의 70년 포로가 끝나고 바사(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포로들을 귀환 시킨다. 자원하는 자들은 고곡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유다백성들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와 처음 한 일은 성전을 짓는 일이다. 에스라와 스룹바벨의 주도 하에 성전이 터가 놓이고 완성된다. 비록 중간에 주변의 방해로 13년 정도 정지 되지만 마침내 완성된다. 이 성전은 A.D. 70년 디토 장군이 예루살렘을 멸망 시킬 때가지 보존된다.


4. 헤롯 성전(B.C. 19∼A.D. 70)


헤롯 성전은 엄밀하게 새로운 성전이 아니다. 그럼에도 헤롯 성전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이전의 성전과는 차원이 다른 화려함과 웅장함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이두매인이었던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룹바벨 성전을 개증축하여 솔로몬 성전보다 더 크게 짓는다. 물론 화려함까지는 재정적인 부족으로 갖추지 못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성정을 가르키며 자랑할 만큼 거대하고 화려했다고 한다.


Ⅱ. 상징과 환시 속의 성전


1. 에스겔의 성전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하나님의 환상을 본다. 마지막 장면에 하나님의 성전이 새로 지어진다. 이 성전은 실제의 성전은 아닌 환상의 성전이다. 후에 완성될 성전을 환상을 통해 보여주신다. 대단히 상징적인 성전이다.

 

2.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고 죽을 때 죄목 중 하나가 자신을 성전이라 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성전으로 소개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막이 열리고, 예수님을 성전으로 소개한다.


3. 성전인 그리스도인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성전으로 부른다. 바울이 의도한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의미는 거룩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성전으로 삼고 그 안에 계시니 성전인 그리스도인의 몸을 함부로 더렵혀서는 안된다는 취지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후서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4. 성전인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의 성막이 내려온다. 또한 어린양으로 성전으로 소개한다. 이것은 어린양을 통해 성막의 기능이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성소의 구성과 기능


성소의 구성과 기능
성소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세마포 포장 울타리로 둘러싸인 성소의 뜰과 성막의 첫째 칸인 성소 그리고 둘째 칸인 지성소로 구분됩니다.


1, 성소뜰( 출27:9-19, 38:9~20)

1) 입구
그리스도의 흠 없는 의를 상징하는 흰 세마포 포장으로 둘러 쳐진 성소 뜰의 동편에 하나의 입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범죄로 인하여 닫혀진 "에덴동산 동편"(창3:24)의 입구가, "생명나무의 길(창3:24)이시며(요14:6), 구원의 문(요10:9)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열렸음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2)번제단
뜰에서 잡은 제물의 몸은 뜰 중앙에 있는 놋으로 만든 제단 위에서 사루어졌고, 피는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레4:7,18,25).
성소의 뜰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동안의 봉사를 드러내는데, 정방형의[바깥]뜰 중앙에 있는 번제단이 상징하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간을 위한 속죄와 화목제물로 온전히 불사루셨으며 그 모든 피를 남김없이 쏟으셨습니다.

3)물두멍
번제단을 지나면 "회막과 단 사이에"(출30:18)놋으로 만든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회막에 들어갈 때나 제단에서 봉사하기 전 제사장들은 여기서 수족을 씻어 정결하게 해야 했습니다. (출 30:17~21). 이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얻은 속죄와 함께 경험해야 하는 "중생의 씻음"(딛3:5)인 침례와 세족예식(요13:7~15)을 적절히 상징합니다.


-정리-
이리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지정된 제물을 마련하여 성소에 들어온 사람은 뜰에 준비된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불로 사루어지며 물로 씻겨져,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1:19)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칭의(Justification)의 경험이요,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회개한 사람이 즉시 경험하게 되는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뜰에서 행해진 봉사는 모두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통하여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정방형을 이루는 이[바깥]뜰의 한 가운데 번제단이 있었듯이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의 중심은 번제단으로 상징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인류를 위한 속죄제물과 화목제물로 온전히 바쳐졌으며,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물이"(요19:34)흐름으로써 죄악을 씻는 샘이 열린것입니다. (슥13:1) 그것이 물과 불과 피로 이러어진 지상생애 동안의 그리스도의 봉사입니다.


2, 성소[첫째 칸] (출25:23~40, 37:10~28)

1)등대
성막의 첫째 칸이 되는 성소에 들어가면 왼편 곧 남쪽에 순금을 쳐서 만든 등대가 감람나무의 기름을 태우며 빛을 내고 있습니다.(레24:2)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그것은 기름이 상징하는 성령(슥4:2~6)의 능력이 성경말씀을 통하여 역사할 때 "불로 연단한 금"(계3:18)같이 변화된 성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자요, 교회입니다. (마5:14~16)

2)떡상
성막에 들어서면 오른편인 북쪽에 "생명의 떡", 곧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요6:48,51)게 되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 열두개의 누룩 없는 빵을 두 줄로 나란히 차려놓은 진설병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요1:14)신 그리스도, 육신이 말씀으로 표현된 성경말씀을 신비하게 상징하고 있습니다.(요6:48~51,63)

3)분향단
첫째 칸의 서편 휘장 앞에는 정금으로 입힌 분향단이 있어 아침 저녁 등불을 손질할 때 함께 향을 사루었습니다.(출30:7,8)
"이 향은성도의 기도들"(계5:8, 8:3)인데, 향이 지성소로 넘어가 온 방을 채우듯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은혜의 중보로 성도들의 탄원이 하나님께 가납되고 있는것입니다.


-정리-
이처럼 말씀을 통하여 마음을 밝히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날마다 새 힘을 공급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말씀과, 성령의 감동하심과 그리스도의 중보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이미 십자가로 의롭게 된 성도는 그 상태를 유지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와 성숙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입니다.(엡4:13~15 ; 벧후 3:18)

성막의 첫째 칸인 성소에서의 봉사는 승천하신 직후부터 시작된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에서의 봉사를 적절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상생애를 상징한 성막 뜰의 봉사를 통하여 마련하신 물과 불과 피로써 죄인을 의롭게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오순절부터 시작된 하늘의 성소봉사를 통하여, 의롭게 된 사람들을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되도록 진리의 성령을 통하여"거룩하게 하"(요17:15,17)시는 봉사를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경험임과 동시에 구속사의 과정인것입니다.
성화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딛전4:5)와 그리스도의 중보가(히7:25) 모두 첫째 칸에 차려진 등대와 떡상과 향단의 상징으로 적절히 상징되고 있는것입니다. 성화는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에 하늘 성소에서의 봉사가 시작된 오순절은(출29:1~37; 시133:)감람의 기름으로 상징된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이 1세기 말의 계시 가운데 목도한 그리스도도 일곱 금촛대사이에서 봉사하시는 성소에 계신 그리스도였습니다.(계1:12,13)


3, 지성소 [둘째 칸](출25:10~22, 37:1~9)

1)언약궤
성막의 둘째 칸인 지성소 중앙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간직된 언약궤라 부르는 법궤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안팎으로 금을 입힌 법궤의 뚜껑은 정금판으로서 이것을 속죄소, 혹은 시은좌라고 부렀습니다.(출25:17~21)

2)그룹들
그리고 뚜껑인 속죄소의 금판에 연접하여, 양편에서 날개를 마주대하여 펼친 두 그룹(cherub) 율법에 얼굴을 향하여 지극한경외심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3)쉐키나 - 임재의 영광
두 덮는그룹 사이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영광의 빛이 드리워 있습니다. 이러한 빛의 임재를 "쉐키나"(shekinah)라고 불렀는데 "거하다"(shakan)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십계명이 보관된 언약궤 뚜껑인 속죄소 위에 마주 서 있는 "그룹사이에 좌정하"신 분으로 알려졌습니다.(시80:1 ; 90:1)

4)속죄소
율법 위에 차려진 하나님의 보좌는 공의만을 드러내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대속죄일의 특별한 의식을 통하여"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레16:15)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희생제물의 피가 뿌려질 때 , 그것은 죄를 속하는 속죄소가 되고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좌(mercy seat)가 되는 것입니다.(출25:22) 그것은 온 인류가 범한 율법이 요구하는 공의의 대가를 십자가의 대속으로 넘치게 치르신 하나님의 은혜가 법궤 위를 덮을 때, "의와 공의가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시89:14)게 하신 구속의 섭리인 것입니다.(시85:10)


-정리-
이리하여, 뜰에서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의롭게 되고, 첫째칸인 성소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한 성령의 사역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2)거룩하게 됨을 경험한 성도들은 마침내 영화롭게 되어 하나님 앞에 이르는 영광의 경험에 참여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어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고전15:51,43)게 되는 구원의 극치요 완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