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5대 제사(제사와 거룩)

레위기 5대 제사(제사와 거룩)

하나님은 사람을 제단에서 만나기를 원하셨다.
가인의 제단은 실패한 제단이었고, 아벨의 제단은 성공한 제단이었다.
가인의 제사를 원하시는가?
아벨의 제사를 원하시는가?

번제(燔祭) - 하나님과의 관계

Holocaust, burnt offering,
히브리어 : 코르반 올라 קָרְבַּן עוֹלָה‬, korban olah

번제의 영문명인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단어는 앵글로노르만어 단어인 홀로카우스테(holocauste)와 후기 라틴어 홀로카우스툼(holocaustum)에서 파생된 중세 영어 홀로코스트(holocaust)에서 유래하였다.

제물 : 소, 양, 염소, 비둘기
* 자연적 생명을 처단해야만 한다. 생명을 처단하려면 반드시 검(劍)을 사용해야 한다.
오늘날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히브리서 4:12)

* 검을 사용하여 죽인 후 껍질을 벗기고 각을 뜬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과 및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인데 ('올라가다', '드리다'의 뜻), 제물이 제단 위에서 태워질 때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제사로서, 모든 제사의 기초가 되며 이 제사 없이는 다른 제사를 드릴 수 없다.

​번제는 제물의 모든 부위를 완전히 불살라 그 향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온전히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한다.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번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당신의 전 존재를 십자가에서 번제가 되어 하나님께 올려드린 그리스도처럼 우리 몸과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창조목적이며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이다.

로마서 6: 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구원이란 자신만을 위해 살던 자가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번제로 드려지는 복된 자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이사야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린도후서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사람은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께 나를 드리지 않으면 사단에게 드릴 수밖에 없으므로 번제의 삶이 최고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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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素祭)


화목제(和睦祭)


속죄제(贖罪祭)



속건제(贖愆祭)






신약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산, 예배와 삶의 기준 제시하다.
유대인 자녀 성경교육의 출발점 … 선택된 백성이 지켜야 할 제사와 율법 담아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겠다고 단단한 결심을 했다가 맞게 되는 첫 번째 큰 산이 레위기일 것입니다. 창세기를 시작으로 출애굽기까지 단숨에 은혜롭고 재미있게 읽다가 레위기를 만나면 자기와 밀당이나 타협을 시작해가며 성경 읽기가 느슨해져 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레위기의 가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동양의 오래된 장례문화나 제사문화에 대한 인식으로 ‘제사’라는 말을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러브레터’입니다. 그 이유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위해 ‘사랑’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기 위해 세세한 항목까지 시행세칙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하나님의 러브레터입니다. 또한 레위기는 ‘제사장 나라 교과서’입니다.


공의의 하나님 앞에 죄지은 인간들은 감히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공의의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간들이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레위기의 다섯 가지 제사, 즉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번제, 우리의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소제, 감사의 제목을 이웃과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화목제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어겼을 때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을 구하며 나아가는 속죄제, 그리고 부지불식간 지은 죄에 대해 이웃에게 변상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속건제가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제사는 용서의 길일 뿐만 아니라 인생들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삶의 길입니다.


레위기를 통해 다섯 가지 제사를 가르쳐주신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거룩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의 이 마음을 잘 표현한 말을 꼽으라면 ‘누구든지’와 ‘힘이 미치지 못하면’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레 1:2) “만일 그의 힘이 어린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레 5:7)


이렇게 제사는 단지 제사법으로 인간들을 귀찮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용서를 받고 다시 제사장 나라의 거룩한 시민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자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가지 제사를 드림에 있어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첫째, 제사를 드리는 자는 반드시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제사를 드리는 자는 반드시 ‘제사장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셋째, 제사를 드리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에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를 한 가지라도 어기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거룩한 제사가 되지 못합니다. 이후에 보면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은 제사에 대한 세 가지 조건을 지키지 않음으로 ‘다윗의 길’과 대비되는 ‘여로보암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은 1500년 동안 다섯 가지 제사와 제사장 나라의 3대 명절인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과, 3대 절기인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지키며 제사장 나라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둘로 나뉘면서 1500년 동안 이어온 제사장 나라 ‘제사’가 하나님 나라 ‘예배’로 바뀌게 됩니다.

제사의 세 가지 조건인 예물, 제사장의 도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어린양 제물이 되셔서, 왕 같은 대제사장의 직분으로 하늘 지성소인 십자가에서 단번에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 나라 15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매번 제사를 드려야 했고, 대제사장은 아론으로부터 시작해 매년 한 차례씩 죽음을 각오하고 대속죄일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셔서 단번에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배의 세 가지 조건, 즉 예물 대신 ‘오직 예수 이름으로’, 제사장의 도움 대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 대신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기의 다섯 가지 제사와 제사의 세 가지 조건의 의미를 바로 알면 오늘 우리도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레위기는 흔히 구약의 수면제라 부른다. 다양한 제사들과 복잡한 제사의 절차, 용어들, 그리고 아무런 구체적인 의미와 교훈이 설명되지 않은 여러 가지 따분한 법들과 규정들로 가득 차 있다. 그로인해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레위기는 마치 넘기 어려운 높은 담이나 거대한 산과 같이 느껴진다. 필자는 오늘부터 20회에 걸쳐 여러분과 레위기라는 높은 산을 오를 예정이다. 여러분은 이 등반 과정에서 레위기의 산은 기막힌 장관을 연출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산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레위기는 독자 여러분에게 수면제가 아닌 시원한 청량제이자 영혼을 강건케 하는 영양제로 다가갈 것이다.


레위기는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다섯 살 즈음 자녀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는 오경(토라)의 첫 번째 책이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가 아닌 레위기로 자녀의 성경 교육을 시작했다는 것은 레위기의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실제로 레위기는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그리고 예배자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교육하는 교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기는 오래도록 교회로부터 홀대를 받아왔고 혹은 잘못된 풍유적 해석으로 설교되고 교육되어왔다. 레위기는 이제 재평가되고 본래의 위상을 되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레위기는 그야말로 복음의 진수를 담고 있으며, 설교의 보물창고이자 마르지 않는 신학적 샘물이다. 특히 신약을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국내에 좋은 레위기 주석들이 있지만 레위기 전공자인 필자는 마침 지난 5월 말에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새물결플러스)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지면을 통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많은 내용들과 다양한 도표와 도식, 그리고 그림들이 사용된 상세한 주해는 그 책을 참고하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레위기가 기록된 정황과 목적


레위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봐이크라’(wayyiqra ar”q.YIw:)로 뜻은 “그가 부르셨다”이다. 이것은 레위기의 첫 번째 단어인데, 히브리어 성경의 각 책들은 첫 번째 단어를 제목으로 삼는다. 그래서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레위기 말씀을 주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레 1:1). 여기서 “회막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레위기 앞의 책인 출애굽기는 성막(회막) 완성에 대한 보고와 더불어 마무리된다(출 40:33~38). 이때 성막에는 여호와의 구름 기둥이 강림하고 성막 전체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찬다. 하나님의 구름은 그 전에는 시내산 꼭대기에 내려와 있었다. 이것은 시내산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 예배의 장소, 곧 성전이었음을 말해준다. 시내산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암시는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시내산에 백성들이 모일 때, 삼중으로 배치된다(출 24장): 산 정상 가까이(모세); 산중턱(백성의 대표); 산기슭(백성들). 이것은 성막의 삼중 배치와 동일하다: 지성소(대제사장); 내성소(제사장); 마당(백성들). 그 시내산 성전 위에 임한 구름이 이제 회막으로 이동해 왔다. 쉽게 말해 성막이 완성된 후, 여호와께서는 그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고자 이동해 오신 것이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신탁의 장소가 바뀌었다. 이제 시내산 정상이 아닌 “회막에서”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선포될 레위기의 율법이 주어진다.


요컨대, 출애굽기에서 성막이 완성되었다(출 25~40장).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제 성막의 운용에 대한 문제와 성막을 중심한 생활 규칙이 주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것은 성막에서의 제사 규범과 진영 (그리고 땅)에서의 생활 규범이다. 그 내용들을 담은 책이 바로 레위기다. 시내산 아래에서 예배와 삶에 대한 규범을 전수받은 후, 백성들은 이제 인구 조사와 더불어 진영을 재정비한 뒤 민수기 10장 11절에서 비로소 시내산을 떠난다. 민수기는 그 후의 광야에서의 기록이다.


앞서 말한대로 레위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봐이크라’인데, 영어 제목 ‘Leviticus’와 이를 따른 우리 말 성경 ‘레위기’는 이 책의 내용에 걸 맞는 제목이 아니다. 헬라어 구약성경(70인경)이 이 책의 제목으로 레위띠꼰(leuitikon Leuitikon)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레위기에는 레위인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나오지 않으므로(레 25:32~34) 다소 엉뚱한 제목이다.


레위기는 제사장들을 위한 지침들로 가득 차 있으며 사실은 제사장들보다는 평민을 위해 쓰인 책이다. 이 책은 곳곳에서 모든 법들이 제사장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숙지해야할 중대한 법들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상세한 제의적 절차와 거룩한 삶의 기준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레위기 법의 준수를 통해 세상 민족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구현해야할 사명을 안고 선택되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제사법 및 율법을 공부해야 하는가?


예수님 이후 신약 시대에 제사는 폐지되어 더 이상 드리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으로 모든 희생 제사가 단번에 영원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히 9:11~12). 그렇다면, 왜 우리는 레위기, 특히 제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레위기의 제사법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의미의 핵심이 담겨 있고, 또한 예배의 본질이 담겨 있다. 구약의 율법은 형식과 틀 속에 본질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 형식과 틀 자체도 어떤 중요한 신학적 영적 메시지를 전해준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다. 완전하게 하려 함이다”고 말씀하셨다(마 5:17). 혹자는 이것을 오해하여 구약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예수님의 이 말은 율법의 형식(껍데기)은 폐기되고 율법의 본질(알맹이)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율법의 완성적 폐지라 할 수 있다. 율법의 형식인 제사와 제의, 음식법, 정결법, 제사장 제도, 성전 제도, 이 모든 것들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제사의 본질인 ‘헌신과 예배,’ 음식법의 본질인 ‘거룩한 구별,’ 정결법의 본질인 ‘도덕적 순결,’ 제사장과 성전의 본질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다.


요컨대, 신약과 구약의 관계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다. 형식과 껍데기는 철폐되었기에 신약과 불연속적이고, 그 정신과 본질은 신약에서 완성되어 이어지므로 연속성을 지닌다. 이러한 율법의 완성적 폐지, 즉 형식의 폐기와 본질의 성취는 구약 율법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


깔끔히 정돈해야 할 제사 용어들


레위기 독서를 어렵게 하는 것은 많은 전문적인 용어들과 더불어 여러 가지 제사와 의식들, 그리고 법들에 대한 복잡한 설명이다. 특히 제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제사 용어들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사의 종류(5대 제사)

레위기는 1~7장에서 다섯 가지 제사를 규정한다.
이것을 소위 ‘오대 제사’라 한다.

1. 번제(燔祭) : 전체를 태워 모두 바치는 수직적 헌신의 제사다.

2. 소제(素祭) : 유일한 곡식의 제사로 주로 감사의 제사다.

3. 화목제(和睦祭) : 기본적으로 감사와 찬양, 수평적 나눔을 위한 제사다.

4. 속죄제(贖罪祭) : 도덕적 죄와 신체적 부정결을 해결하기 위한 제사다.

5. 속건제(贖愆祭) : 재산상의 피해를 준 죄를 위한 배상의 제사다.

제사법을 다루는 레위기 1~7장은 내용과 주제에 의해 대략 1~5장과 6~7장으로 양분된다.
전자는 각각의 다섯 가지 제사의 절차와 방법에 대한 규정이고,
후자는 그 다섯 가지 제사의 추가 규정들로 각 제물들을 태운 뒤의 후속조치, 곧, 재와 잔존물의 처리, 그리고 남은 고기의 분배 및 먹는 방법 등을 상세히 설명한다.

제사의 방식

제사의 방식이나 제물을 바치는 동작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들이 나타난다.
거제, 요제, 그리고 전제(관제)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제사 종류가 아닌 제사 방식에 대한 용어들이다.
거제와 요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1. 거제(擧祭) : 히브리어로 테루마.
 이것은 흔히 들어 올리는 제사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단순히 여호와를 위해 “성전에 바쳐진 제물”(contribution)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5장에서 백성들이 “자원하여 가져온 것”의 히브리어가 ‘테루마’다(출 25:2). 엄밀히 이것은 제사 드리는 방식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에서 기존 용어 ‘거제’를 그대로 사용한다.

* 거제(테루마)  תְּרוּמָה  스트롱번호 8641

1. 헌납.  2. 요제
발음 [ terûwmâh ]
어원  / 731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6회 사용

2. 요제(搖祭) : 히브리어 테누파
흔히 이것은 흔들어 바치는 제사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동사 ‘누프’는 “흔들다”는 의미를 포함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이것은 단순히 제단 앞에서 제물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제사장들을 위임할 때 일단 그들의 손에 많은 제물들을 들어 올린 동작을 한 뒤, 그것들을 제단에 바친다(레 8장). 이때 그 제물의 막대한 양을 고려해 볼 때 손에 쌓은 뒤 흔들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단순히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여러 학자들이 오히려 이것을 ‘거제’(heave offering)로 번역하는데 우리는 혼동을 피하고자 전통적 번역 그대로 ‘요제’(wave offering)를 따른다.

* 요제(테루마) תְּרוּמָה  스트롱번호 8641

1. 헌납.  2. 요제
발음 [ terûwmâh ]
어원  / 731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6회 사용


3. 전제(전제) : 히브리어로 네세크
(neseq %s,n<)라 칭한다. 이것은 ‘붓는 제사’로서 주로 포도주나 독주(아마 맥주), 혹은 기름을 제단에 붓는다(창 35:14; 출 29:40; 레 23:13; 민 28:7 “독주의 전제”). 전제는 구약에서 60여 차례 나타나지만, 어떤 방식으로 제단에 부었는지는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 전제(메세크)  נֶסֶךְ 스트롱번호 5262

1. 전제.  2. 주상
발음 [ neçek ]
어원  / 525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회 사용

기타 제사 용어

1. 예물(고르반) : 짐승의 제물들은 모두 ‘예물’로 불린다(레 1:2). ‘예물’의 히브리어는 코르반(קָרְבָּן)으로 ‘가져온 것, 바친 것’이라는 의미이다. 제단에 올리는 희생 제물들 외에도(레 1-7장) 제단에 올리지는 않으나 성전에 바치는 모든 예물(레 27장)은 고르반이라 부른다.


קָרְבָּן 스트롱번호  7133

1. 제단.  2. 희생 제물. 3. 레 2:1
발음 [ qorbân ]
어원  / 7126에서 유래, 연계형 :קָרְבַּן
구약 성경  /  80회 사용
  • 1. 명사, 남성 제단, 희생 제물, 레 2:1, 4, 12, 13,  7:13,  9:7, 15.
  • 관련 성경  /  예물(레 1:2, 27:9, 민 5:15), 제물(레 4:32, 겔 20:28), 희생(겔 40:43).  [동] 드리다(레 2:12, 느 10:34).


고르반(קָרְבָּן)에 대한 묵상(막 7:11) : 수직과 수평이 충돌할 때

우리말로 된 성경에서 “고르반”을 찾으면 마가복음 7장 11절 단 한 구절만 검색됩니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개역개정)

* 고르반의 어원과 의미

“고르반”은 히브리어 어근 까라브(קרב)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까라브의 의미는 ‘가까이 있다, 가까이 가져오다’입니다.
“고르반,” 즉, 꼬르반(קָרְבָּן)은 수동적인 의미가 담긴 형태로, 그 의미는 ‘가까이 가져오는 것(something brought near)’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주로 “예물”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져오는’ 제물을 가리킵니다.

꼬르반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예물은 양과 염소나 소 등의 동물일 수도 있고(레 1:2, 1:14, 4:23 등), 과일이나 빻은 곡식, 빵이 될 수도 있습니다(민 7:10-83). 또한 팔찌나 귀거리 같은 금으로 된 장신구도 꼬르반이 될 수 있습니다(민 31:50).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레위기와 민수기에 집중적으로 쓰였고, 바빌론 포로 이후 제2성전기 시대에 제사 제도를 재건하면서 다시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느 10:35; 13:31). 바빌론 포로 이전에 지키던 하나님의 명령(율법, 계명, 규례, 율례)을 다시 지키는 것이 신앙공동체 재건의 핵심이 됩니다(느 10:29). 하나님의 명령 중에 느헤미야 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은 1)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것(느 10:30), 2)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느 10:31), 3) 성전을 위한 세금(느 10:32-33), 그리고 바로 4) 꼬르반입니다(장자, 첫 새끼, 첫 곡물, 첫 열매 등, 느 10:34-39).

* 마가복음 7장(마태복음 15장)의 의미: 수직과 수평이 충돌할 때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이 꼬르반을 언급했을 때, 제물/예물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7장(마태복음 15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의 여러 계명들 중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 등과 하신 일련의 논쟁들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 논쟁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 중에서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 사이의 충돌이 발생할 경우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 하는가 하는 논쟁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수직적)과 아픈 병자를 고치는 일(수평적) 사이의 문제가 대표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을 우선시했고, 예수님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9-14, 막 3:1-6, 눅 6:6-11).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죄인(악인)의 무리에 거하지 않는 것(마 9:9-13, 막 2:13-17, 눅 5:27-32), 금식하는 것(마 9:14-17, 막 2:18-22, 눅 5:33-39), 그리고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지 않는 것(마 12:1-8, 막 2:23-28, 눅 6:1-5) 등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반대로,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마 9:35) 중풍병자와 앞 못보는 사람, 말 못하는 사람과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배고픈 자들이 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그 어떤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선악 판단의 기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은 마가복음 3장 4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개역개정)

성경에 이것보다 더 선명하게 선과 악을 설명하는 구절이 또 있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고, “악”은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의 꼬르반 이야기는 이러한 문맥 속에 위치해 있습니다. 꼬르반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에는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은 물론 성경을 근거로 한 신학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레 27:28)"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 계명을 근거로, 자신들의 소유물을 ‘꼬르반’, 즉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고 선언하면 그 물건을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악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수직적인 신앙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수평적인 명령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 이들은 수직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선택’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또다른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질책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 모두를 잘 지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들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신앙적 선택을 해야 하는데,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선택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그 어떤 명령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2. 화제 : 히브리어로 이쉐(isshe hV,ai)인데, 흔히 불로 태우는 제사로 이해된다(레 1:9; 2:2). 이 단어가 ‘불’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에쉬(esh vae)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불과 상관없는 제사 용어로서 ‘봉헌물, 음식 예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원으로 따지면 이쉐의 어원은 ‘불’이 아닌 ‘선물, 공물’을 의미하는 우가릿어나 ‘소유물’을 의미하는 아랍어 일 수 있다. 더 중요하게는 문맥에서 “화제”가 어울리지 않은 사례들이 많다. 특히 태우지 않는 제물도 이쉐(isshe hV,ai)라 칭하는데(레 2:10; 6:17) 예를 들어 결코 태우지 않는 진설병 상에 놓은 떡도 이쉐라 칭한다(레 24:6~7, 9). 심지어 붓는 술의 전제도 이쉐로 칭한다(민 15:10). 따라서 이쉐는 ‘화제’라기 보다는 ‘음식 봉헌물’(food offering) 혹은 ‘헌물’(gift offering)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통적 견해를 따라 그대로 ‘화제’를 사용할 것이다.

נושא

1. 신하.  2.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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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5대 제사

레위기에 나오는 5대 제사가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나하고 친하려면 이렇게 하라" 또 "나는 이런것을 싫어하니 하지마라" 라고 하나님 쪽에서 프로포즈해 온 것이 레위기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려면 자기 힘으로 하면 안 된다.


결혼예비학교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사랑의 5가지 언어"라는 책이 있다. 심플한 책인데 수백만 이혼가정을 살렸다. 그 내용은 결혼할 배우자가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지를 5가지를 찾으라는 것이다. 배우자의 일 순위를 상대가 맞추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선물을 좋아한다고 선물을 싫어하는 배우자에게 선물을 자꾸 사다주면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것은 문제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마찬가지이다. 예배는 절대 우리식으로 하면 안 된다. 시대가 음악을 좋아하니 예배를 음악중심으로 간다는 것은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도의 방법이지 예배의 방법은 아니다. 문화를 따라가는 것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가는 것이고, 사람을 얻었으면 다시 하나님께 가야 한다. 문화는 연구하는데 하나님을 연구하지 않으니 문제가 생긴다. 교회에 사람들이 오는데 안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가야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5가지 제사의 순서를 보면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이다. 하나님이 제일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접근 할 때는 속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배의 정신이 여기 5대 제사 안에 다 들어가 있다.




5대 제사와 3대 절기

 

1. 율법시대의 특징

 

율법시대에는 동물의 피로 죄를 속죄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짐승의 제사를 통해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사람들의 죄가 용서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제물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매일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하는 그들의 제사는 일상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드리는 제사의 종류에는 매일 드리는 상번제와 안식일제사, 속죄일, 초하루 월삭과 하나님께 반드시 드려야하는 3대절기와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까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3대 절기로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이 있으며, 5대 제사로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나눌 수 있으며, 제사방법으로는 화제, 전제, 요제, 거제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제사의 규례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복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구분한 제사법으로 단순히 행하는 의식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께서 그 의미를 부여하시고, 제사법뿐만 아니라, 제물까지도 직접 정해주시는 데로 행하여야 하는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2. 5대 제사

 

가. 번제(燔祭=올라)

다른 제사와는 다르게 희생제물 전부를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자원하여 자신을 드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뜻으로 완전한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가 생명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번제에는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드리는 상번제(常燔祭)와 절기제사마다 드리는 번제는 단 위에서 불로 제사하므로 제단 위 불은 항상 꺼지지 않아야 되었습니다. 이 제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을 구별하여 세우시고 온전한 번제로 주의 단 위에 드리는 직무를 수행하게 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온전한 헌신을 드리는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세우신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장자뿐만 아니라, 짐승까지도 다 거룩히 구별하시고 그들은 다 내 것이라 구분하신 초 태생이며 첫 열매를 뜻합니다.(민수기 3장12-13절) 제사제물은 생축의 초 태생의 숫컷입니다.

상번제는 무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다는 의미의 소제와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하는 전제와 함께 드려야 하였습니다.


요아킴은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가축 중에 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평소 상품의 물건으로 찜해 둔 녀석을 골라 몸 상태를 잘 살핀 후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성소로 가져갔다. 성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크고 작은 짐승을 바치려고 올라와 있었고 제사장들은 제사를 집행하느라 분주했다. 제단은 피로 흥건히 얼룩져 있었고, 제단 주변에는 짐승의 흘린 피 자국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잠시 기다리다 자신의 순서가 되자 요아킴은 양을 끌고 자신의 번제를 담당할 제사장 앞에 섰다. 제사장은 양의 몸을 다시 면밀히 검사하여 흠이 있는지 살폈다. 합격 판정이 내려지자 요아킴의 번제 바치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손을 양의 머리에 얹고서 이 번제를 통해 비천한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왜 이 번제를 바치는지 말씀드렸다. 그는 시편의 감사시를 낭송하여 부르면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린 뒤 도살용 칼로 그 짐승의 고통이 최대한 빨리 끝나도록 목의 급소를 찔러 짐승을 도살했다. 요아킴과 제사장은 번제의 절차를 따라 신중히 그 제물을 마지막 순서까지 무사히 잘 드렸고 정성을 다해 바친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약속을 기억했다. 요아킴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은혜가 집안에도 가득히 들어차 있음이 느껴졌다. 요아킴은 매일 자신이 받은 축복을 감사하며 지냈고 어려운 시기가 닥칠 때에는 번제를 드린 순간의 결심과 감격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인내했다.


명칭에서 살펴 본 번제의 의미


요아킴이 드린 제물은 번제였다. 이때 그 제물은 전체를 모두 제단 위에 올려서 태웠다. 번제는 우리말로 ‘태우는 제사’를 뜻하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에서도 마찬가지로 ‘the burnt offering’이다. 그러나 번제의 히브리어 ‘올라’(ola)는 단순히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올라가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알라’(ala)에서 기원한 명사다. 번제의 이름 ‘올라’는 우연하게도 우리 말 ‘올라가다’와 발음이 일치한다. 이런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번제의 짐승의 모든 부위가 제단 위에 ‘올려 바쳐져’ 불에 타면서 짐승 전체가 연기되어 향기로 하나님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를 태워 드린다는 의미를 반영하여 어떤 영어 성경들은 ‘전번제’(whole burnt offering)로 번역하기도 한다.



▲ 번제를 드리기 위해 양과 염소, 또는 소의 가죽은 벗겨지고 몸 안의 오물들이 제거됐다. 또 가죽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태웠다. 번제는 이처럼 누구나 드릴 수 있었지만 드리는 자의 전적인 헌신을 필요로 했다.

번제의 특징


희생 짐승은 마당의 제단 근처에서 잡는데, 작은 가축인 양과 염소의 경우 “제단 북편”으로 도살 장소가 정확히 명시된다(레 1:11). 그러나 대형 가축인 소의 경우 위치가 정해지지 않는데, 아마 그 이유는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소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하고 다 태운다. 가죽은 제사장의 수고비로 돌아간다(레 7:8). 가죽을 벗기는 행위에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속사람의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실은 가죽의 특성상 잘 타지 않고 다른 부위도 덩달아 잘 타지 않게 되며 또한 향기로운 냄새가 아닌 악취를 풍기기 때문에 가죽을 벗겼을 것이다.


가죽을 벗겨내고 짐승으로부터 더러운 똥와 오물들을 다 깨끗하게 제거한 뒤 모든 부위를 다 드렸다(레 1:9): 몸통, 머리, 정강이, 창자. 번제는 다른 제사들과 달리 인간의 몫이 없이 모두 하나님께 태워져 바쳐진 이유로 랍비들은 번제가 다른 희생 제사들보다 우월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적어도 감사의 목적으로 바친 목축하는 사람의 짐승의 번제와 농사꾼의 곡식의 소제 사이에 우열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번제가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가장 기본적인 감사와 헌신의 제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드리는 때


오대 제사중 처음 세 가지,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는 자발적인 제사로 ‘감사’가 그 기본적 동기라 할 수 있다. 물론 각 제사의 용도는 그 외에도 다양했다. 예를 들어 소제의 제물은 감사의 예물로만 바치지 않고 가장 가난한 사람을 위한 속죄제로 바쳐질 수 있었다. 번제 또한 자신의 비뚤어진 마음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었고 중대한 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자 바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번제의 취지는 “감사와 봉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번제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때에 성전에 올라가 번제를 드릴 수 있었다.


성경에는 노아가 홍수 후에 감사의 번제를 드릴 때 처음 등장한다(창 8:20). 여호와께서는 그 번제의 향기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의 악한 본성으로 인해 물로 땅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창 8:21; 9:11). 이처럼 번제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완화하고 태도를 바꾸시게 하는 기능이 있었다. 어린 양을 바친 아벨의 제사 역시 번제의 속성을 가졌다(창 4:2~4).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담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르쳐주신 제사법이 후손에게 전수된 것이 번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번제에 드린 짐승의 가죽이 제사장에게 돌아간 것은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입혔던 것을 연상시킨다(창 3:21). 이것은 분명 신학적 암시를 담은 구절이다. 에덴이 일종의 성전이었다고 가정하면 아담은 그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최초로 번제 드리는 법을 전수받은 인물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성경에서 번제는 대부분 공적인 행사에서 기본 제사로 드려진다. 의외로 지극히 사적인 번제는 구약성경에서 드물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면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을 표시하기 위해 아낌없이 모두 드릴 때(삼상 6:13~14), 완전한 헌신을 다짐할 때(창 22:2; 삿 11:31), 고난 중에 하나님께 탄원하며 의지하고자 할 때(삿 21:2~4; 미 6:6) 번제를 바쳤다. 때로는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화목제와 더불어(레 7) 번제를 함께 올리기도 했다(레 22:18). 그러나 번제를 의무적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크게 다음 세 가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a. 상번제: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를 의미한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사장이 일년 생 숫양을 드리곤 했는데(민 28:3~4)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침에는 처소에서, 저녁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마음으로나마 번제에 동참했을 것이다.

b. 안식일과 절기: 상번제 외에 안식일에는 소제와 전제와 더불어 일년 생 숫양 두 마리를 함께 드렸다(민 28:9). 절기마다 번제에 요구되는 짐승과 그 숫자가 달랐다(민 28~29장 외).

c. 기타: 경우에 따라 속죄제를 드릴 때 번제가 요구되기도 했다. 일례로 레위기 12장에서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부정해졌는데 이때 그녀는 일정 기간의 자연 정화 과정을 거친 뒤 성전에서 속죄제와 더불어 번제를 바쳐야 했다. 그 외에도 다시 정결한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흔히 속죄제와 번제를 함께 드렸으며(레 14:13; 15:15), 나실인 서약을 할 때도 속죄제 및 화목제와 더불어 번제가 요구되었다(민 6장). 출산한 여인의 경우 속죄제는 부정결한 산혈로 인한 제단의 오염을 씻어내기 위해 바쳐지나 번제에는 자녀를 얻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담겨있을 것이다. 부정한 자를 깨끗케 하는 속죄제에 번제가 동반되는 것도 다시 정결해진 것을 감사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


기능과 목적 


번제의 일차적 목적은 감사로 드리는 헌신과 봉헌이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 그분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진술이 그 증거다(레 1:2~3). 즉 번제는 여호와께 전적인 기쁨이 되는 제사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신 하나님의 요구는 곧 아브라함의 완전한 섬김과 헌신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창 22:2). 자주 번제는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께 바쳤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 화목제가 동반될 수 있는데 번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드리고 화목제는 사람들을 초청해 그 고기를 먹으며 감사와 기쁨을 나누었다(출 18:9~10).


제물에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어야 한다. 정성스러운 번제를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를 기쁘게 받으신다’고 말한다. 미드라쉬 레위기 주석에서 랍비들은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 올리는 희생 제물은 부서진 마음이다; 오 하나님, 부서지고 회개한 마음을 멸시하지 마소서.” 번제에 의한 속죄는 전적인 헌신의 표시에 뒤따른 부수적 효과라 할 수 있다(레 1:4):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발생한다. 이미 죄를 위한 속죄제와 속건제라는 제사가 별도로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번제는 이런 제사들과 어떤 기능적 차이가 있는가? 속죄제·속건제는 쌍둥이 제사로서 구체적인 죄의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면 번제를 드린 목적은 인간의 기본적 죄성(sinfulness), 즉 원죄의 속죄를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시기 전까지는 원죄 역시 거듭해서 속죄해야 할 대상 중 하나였다. 레위기에서 속죄제·속건제가 신설되기 전에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욥 1:5). 즉 번제는 본래 구체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기도 했으나 속죄제·속건제가 생긴 이후로는 원죄를 속죄하는 제한적 기능만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참조. Milgrom 1991: 175~176).


물론 레위기에서 제사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잘못을 저지른 뒤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번제를 드리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다윗이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야욕에서 인구조사를 벌이자 그 결과가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여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다윗이 황급히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고, 재앙이 멎었다(삼하 24:25; 대상 21:26). 자기 의를 드러내는 교만은 인간의 원죄의 근원적 뿌리다. 따라서 번제는 원래 하나님께 기쁨의 표시로 바쳐지곤 했지만 때로는 자신의 죄된 본성을 용서받고 욥처럼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죄를 사함받기 위해 드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번제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봉헌물이자 감사의 표시로서 전적인 헌신과 아낌없는 드림을 보여주는 제사였다.

 

번제의 종류와 비둘기 번제가 주는 의미


번제의 짐승은 다음과 같이 등급이 나뉘었다. 본문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새나 곡식을 바치는 것을 허용했다는 사실에서(레 5:7, 11)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각기 다른 등급의 제물이 권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제물의 크기나 종류와 상관없이 번제의 효력은 동일했다는 사실이다. 9절과 13절, 그리고 17절 끝에서 소와 염소/양, 그리고 비둘기의 번제 각각의 효과에 대한 최종적 진술이 나타난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소와 비둘기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차이가 나지만, 여호와는 모든 제물을 동등하게 평가하셨다. 겉모양과 크기를 보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중심과 태도를 보시기 때문이다. 신약에는 두 렙돈 밖에 바치지 못하는 과부의 헌금에도 동일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대목이 있다(막 12장; 눅 21장). 번제의 정신은 차별 없는 제사에 있다. 누구에게나 여호와 앞에 나와 예배할 자격이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 신분이나 빈부, 인종, 지역에 따른 차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질문. "번제 헌물"(burnt offering)을 드릴 때 죽이지 않고 살려서 드릴 수도 있습니까?

질문. "번제 헌물"(burnt offering)을 드릴 때 죽이지 않고 살려서 드릴 수도 있습니까?

답변. 그런 예는 없습니다. 그런 뜻도 없습니다. 

내용 요약.

성경에서 번제 헌물은 단수로 169구절, 복수형으로 81구절이 나옵니다. 단 한 구절도 예외없이 문자 그대로 태워서 드리는 헌물입니다. 제 헌물은 문자적으로 태워서 드리는 헌물입니다. 

이 질문을 하신 분은 keepbible이란 싸이트에서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드려진 것이 아니라 살아서 독신으로 지냈다는 설명을 듣고 '번제 헌물'에 그런 뜻도 있는지 물어 본 것입니다. 물론 전혀 그런 뜻이 없습니다. keepbible에서 누가 그런 뜻이라고 설명했다면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니면 졸지에 헛소리를 해서 형편없는 성경 실력 뿐 아니라 성경을 기록된 대로 믿지 않는 믿음, 흠정역의 오역과 오류 등을 만천하에 드러내 버린 그 교회의 담임 목사를 위해 대신 총대를 맨 듯 합니다. 번제 헌물과 살아 있는 희생물(롬12:1)도 구분하지 못하는 정도의 분별력이라면 개역과 킹제임스 성경의 차이는 제대로 아는지, 롯과 룻을 구분할 실력이 되는지도 의문입니다.  

번제 헌물이 '평생 독신'이란 주장은 차마 킹제임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신자들 중에 그래도 자기는 성경을 기록된 대로 믿지 않는다고는 차마 밝힐 수 없고, 그렇게 믿는 체 하려는 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일반 사전 뿐 아니라 성경 사전까지 그 뜻을 재정의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는 대신 자기 마음에 맞추어 단어를 바꾸거나 단어의 뜻을 바꾸어 버리는 일은 마귀와 그의 사역자들이 하는 것으로 성경은 이를 '부패'라고 합니다. 마음이 부패한 자들은 순수한 말씀을 부패케 한 후에 자기 주장이나 교리를 주장하는데 써 먹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사람들 중에는 사전에도 성경 용례에도 없는 주장을 하면서 성경 기록대로 믿는 사람에게 성경을 믿으라고 적반하장의 헛소리를 해대기도 합니다. 

이미 한국의 킹제임스 성경 진영 안에는 성경을 믿는체 하지만 기록된 대로 믿기보다 자기 믿고 싶은대로 해석해서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말로는 성경을 믿는 것 같지만 성경의 단어의 의미와 용례, 정의를 자기가 원하는대로 바꾸어서 믿는 것입니다. 

번제 헌물이란 뜻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영어 사전은 물론이고 한국어 사전 어디에도 '독신'을 말하거나 암시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이것입니다.

"거짓 신자들은 성경에서 자신이 믿을 수 없는 말씀이 나오면 주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거나 바꿈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주의 말씀에 자기를 맞추는 대신 자기 생각에 맞추어 성경의 어휘를 바꾸든지 그 단어의 '정의'를 바꿉니다." 

번제 헌물이 사람에게 쓰인 경우에는 '독신 생활'이란 뜻이며, 이 의미에 성경의 의미와 정의와 용례를 맞추어야 한다는 어떤 분의 주장은 정상적 사고의 미숙 또는 일반적인 언어 능력의 미비자이거나 오류의 영에 사로잡혔거나 마귀 들린 사람의 주장일 뿐입니다. 실제로 흠정역에는 자신의 오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을 교묘하게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런 짓은 마귀의 사역자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번제 헌물이 사람에게 사용되는 경우는 죽여서 태우는 것이 아니라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 헌물로 드리라는 주의 명령을 받았을 때 모리아 산으로 불과 나무, 칼을 가져가는 대신 일꾼들과 함께 이삭이 평생 총각으로 혼자 살 수 있는 초막을 지을 건축 자재를 들고 갔을 것입니다. 입다가 딸을 죽이지 않고 '독신'으로 살게 했다면 애곡할 일도 없거니와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일 년에 나흘씩 애곡하였다는 말은 코메디에 불과합니다(삿11:40). 참으로 주의 거룩한 말씀을 희화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과 거짓과 오류는 결국 우리 주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칭 근본주의니 성경 신자니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일이 놀랄 일도, 큰 일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사역자들 또한 의의 사역자로 가장한다 하여도 그것은 결코 큰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14,15)

 

 

나. 소제(=민하)

짐승의 피가 아닌 곡식과 고운 가루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드리는 제사로 소제라는 원어의 뜻은 선물 혹은 제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자원제로서 번제 또는 화목제와 함께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제사장이 고운 기름 한 줌과 모든 유향을 취하여 제단에서 화제로 드려지는 소제는 고운 가루처럼 죄가 없으신 순결한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시고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가운데 화목을 도모하기 위해 화목제나 번제를 드릴 때 함께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소제는 그 제물에 누룩을 넣을 수 없으며,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합니다.(레위기2장11-13)

-누룩의 의미: 빵을 빨리 부풀게 하는 누룩은 죄의 상징입니다.

-소금의 의미: 죄를 방지하는 방부제로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언약의 상징인 소금을 소제의 예물에 치게 하신 것은 예언하신 말씀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곡식으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였다


극빈층 위한 ‘속죄 제물’로 허용, 기름과 향 추가하지 않은 밀가루 바쳐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요아킴은 양 500마리를 키우는 목축업자였다. 약간의 논밭에서 농사도 겸하여 지으며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산적 떼들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순식간에 양 500마리를 모두 훔쳐갔고 요아킴의 가족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요아킴은 너무나도 큰 상실감 속에 매일 눈물이 났지만 결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기쁘게 바칠 양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예배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비탄한 형편을 돌아보아주시도록 하나님께 울부짖고 싶었던 요아킴, 또한 그분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하나님께 번제물 대신 소제의 예물을 대신 바치기로 했다.


그는 곱게 빻은 밀가루를 준비하여 기름을 발라 먹음직한 빵을 구운 뒤 깨끗하게 잘 싸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갔다. 제사장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미 그의 소식을 들었던 제사장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로 위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해주었다. 제사장은 그를 위한 소제의 제사를 시작했다. 먼저 요아킴이 소제의 떡을 손에 든 채 하나님께 간절하고도 애절한 기도를 마치자, 제사장은 그 떡을 손바닥으로 한 움큼 뜬 다음 제단에 태워 하나님께 바쳤다. 제사장과 요아킴은 연기로 타오르며 올라가는 그 제물을 보면서 함께 시편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제사를 마친 뒤 남은 떡은 하나님의 정하신 규례를 따라 제사장의 수고비로 주었다. 요아킴은 기쁨과 감격 속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비록 나는 파산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신다. 언젠가 다시 양을 바치고 나아가 소를 바칠 수 있는 때가 올 거야.’ 매일 그의 삶은 감사로 넘쳤다.

 

소제의 특징


파산한 요아킴이 바친 밀가루의 제물은 ‘소제물’이었다. ‘소제’의 제사는 히브리어로 ‘민하’(minha)라 칭했다. 이 단어는 원래 ‘선물’ 혹은 ‘공물’을 칭하는 단어였지만(예, 야곱이 형 에서에게 바친 선물이 민하다), 제의 법안에서는 ‘곡식의 제사’를 칭하는 전문 용어로 쓰인다. 최초의 소제의 장면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나타나는데(창 4:3), 이때 가인은 농사꾼이었기 때문에 곡식의 제사를 바쳤고 그것이 바로 소제다.


소제의 기본 재료는 곱게 빻은 밀가루다. 간혹 몇몇 사례에서는 보리 가루가 요구되었으나 밀가루가 기본 재료라 할 수 있다. 이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일부러 곱게 빻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음식 재료로 집에 보관하는 밀가루를 가지고 정성스럽게 소제물을 준비한다. 따라서 소제물을 빻아서 드리듯 우리도 하나님께 가루처럼 연단되어 곱게 빻아져야 한다며 빻은 가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것은 풍유적 해석의 하나일 뿐이다. 단순히 집에서 기르던 가축 중 좋은 것을 골라 짐승의 제사를 바치듯, 집에서 먹던 밀가루에서 좋은 부분을 골라서 곡식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5대 제사 중에 소제는 유일하게 피 없이 드리는 제사, 즉 곡식을 비롯한 농산물로 바치는 제물이었다. 이것은 번제 및 화목제와 더불어 ‘곡식으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라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소제물의 요소를 살피면, 빻은 고운 밀가루를 주재료로 하고 기름과 유향 등을 가미했다(레 2:2). 제사에 쓰인 기름은 아마도 올리브유(감람나무 기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제물의 품격을 높일 뿐 아니라 밀가루가 잘 타도록 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밀가루 위에는 향기로운 냄새를 내기 위해 고가의 유향을 놓았다. 이것은 생밀가루의 소제였는데, 그 외 요아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제사자는 밀가루로 만든 몇 가지 요리를 소제로 바치기도 했으며(레 2:4~7), 특히 추수기에는 첫 수확한 밀과 보리, 그리고 다른 여러 농산물을 성전에 소제로 바쳤다(레 2:12~16; 레 23장).


소제의 여러 가지 특징을 볼 때 이 제사는 주로 농사꾼과 짐승을 키우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제사였음이 분명하다. 가인의 사례에서 보듯이 농사꾼이 소제를 바칠 때는 가난해서라기보다 그의 소산물을 감사의 제물로 바쳤기에 가난한 자들의 소제물과는 의미가 달랐다 할 수 있다. 기본의 소제물은 앞서 말한 대로 밀가루 1/10에바를 사용하는데(레 5:11 6:13), 약 2.2리터 정도의 양, 다시 말해 콜라 1.5리터짜리 한병 반 정도의 양이다. 거기에 기름을 위에 붓고 하얀 분말로 제조된 유향을 놓았다. 이때 기름과 유향의 양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기름을 밀가루 위에 놓으면 아래로 스며들고 타는 성분의 유향은 밀가루 위에 놓인다. 바로 그 윗부분을 제사장이 손바닥으로 한 움큼 떠서 제단에 올라가 태운다. 이때 기름이 스며있기에 밀가루가 잘 타고 유향이 놓여있기에 하나님께 매우 향긋한 냄새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태워진 소제는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레 2:9). 제단에 태우고 남은 부분은 수고한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가고 그것은 ‘지극히 거룩한 성물’로서 제사장이 성소의 거룩한 뜰에서 그것을 음식으로 먹는다(레 6:14~18).


전통적으로 랍비들은 소제가 극빈자를 위한 번제의 대체물이었다고 주장해왔다. 웬함(Wenham)은 번제는 가죽을 제외하고 제물로 바쳐진 짐승을 전부 태우는 반면, 소제는 고운 가루 한 움큼만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간다는 점을 근거로 이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위한 속죄제에는 밀가루가 허용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소제는 가난한 자에게 있어 번제 대용이었다는 견해에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밀가루로 바쳤던 기본의 소제물은 가난한 자들이 바치기에는 버거운 제물이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왜냐하면 감람(올리브) 기름은 당시 대중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유향은 매우 비쌌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유향을 넣지 않는 음식 소제물을 바쳤을 것으로 보인다. 레위기 8장의 제사장 위임식 장면에서 보듯이 요리된 소제물이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바쳐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분명 비둘기를 바칠만한 형편이 되지 못한 사람이 밀가루를 제물로 바쳤다(레 5:11). 그러나 생밀가루의 소제보다 음식 소제물이 더 쌌다고 볼 수 있는데, 유향을 넣을 필요가 없는데다 밀가루를 요리하면 양이 꽤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가난해도 집에 세 가지 주방 기구 중 적어도 하나쯤은 갖추고 있었을 테니 극빈자들도 요리된 소제를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치는 때


소제는 다양한 목적과 용도로 바쳤다. 먼저 소제는 다양한 목적을 지닌 독자적인 제사로 드릴 수 있었다(레 2:1; 레 6:14~18; 레 6:19~23레 2:12, 14; 23:10, 16; 민 5:11~31)가 있었다. 그러나 소제는 따로 드려지기보다는 다른 동물 제사에 수반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매일의 번제에 소제를 함께 바쳤고, 안식일에 추가되는 정례적 번제(양 두 마리)도 항상 소제와 함께 드렸다(민 28:3~10). 떡과 고기를 함께 필요로 하는 화목제나(레 7:12, 13) 정결 의식과 같은 특별한 목적의 희생 제사에 부수적 제물로(레 14:20), 또한 여러 동물의 희생 제사 및 전제를 드릴 때 풍성한 축제의 제물로 소제가 함께 드려진다(민 15:2~5; 28:19~20, 27~29).


한편 앞서 말했듯이 추수를 감사하기 위해(레 2:12, 14) 칠칠절(오순절)에는 백성들이 ‘새로운 소제,’ 즉 새로 추수한 첫 수확물을 소제로 바쳤다(레 23:16). 레위기 2장 12절의 ‘처음 익은 것’과 14절의 ‘첫 이삭의 소제’는 구별되어야 한다. ‘처음 익은 것’의 문자적 의미는 ‘첫 번째 것의 예물’(히. 코르반 레쉬트)이다. 즉 그것은 ‘첫 수확물의 예물’로서 처음 추수한 밀을 가리킨다. 반면 레위기 23:10~11에 비추어볼 때 ‘첫 이삭의 소제’(히. 민하트 비쿠림)는 보리의 첫 이삭을 말한다. 제사장은 아직 덜 익은 보리의 첫 이삭을 볶은 뒤 기름과 유향을 첨가하여 제단 위에 올린다. 그러나 처음 거둔 밀은 제단 위에 오르는 대신 성소에 봉헌된 성물이되며 그것은 제사장들의 음식으로 사용된다. 참고로 팔레스타인 지역은 보리를 추수한 지 약 두 달이 지나 밀을 수확한다(참고. 룻 2:23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그 지역의 주식은 밀이므로 밀이 나오기 전까지 임시적으로 보리를 먹는 것이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극빈층을 위한 ‘속죄 제물’로 소제가 허용되었다는 것이다(레 5:11~12). 이때 속죄제에 바치는 밀가루에는 기름과 향을 추가하지 않았다. 그가 비싼 유향을 조달하기에는 턱없이 가난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소제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드리는 제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자신의 재량으로 곡식에 피의 효력을 부여하셔서 극빈자들의 속죄를 위한 방편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누구에게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 고대 중동 지역의 화덕의 일종으로 반죽을 안쪽 표면에 붙여 빵을 구웠다.

소제의 종류와 유의사항


소제의 고운가루 규례(레 2:1-10)


안녕하세요. 오늘은 레위기 2장 히브리어 원어 강해 중에서 소제의 고운 가루 규례라는 성경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소제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동물을 드릴 형편이 되지 않아서 고운 가루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평하게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절 베네페쉬 키 타케리브 코르반 민하 라아도나이 솔레트 이흐예 코르바노 베야차크 알레이하 쎄멘 베나탄 알레이하 레보나

성 경: [레2:1]

레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주제1: [소제에 관한 규례 및 그 제물]

주제2: [고운 가루의 소제]

󰃨 누구든지 ... 드리려거든 - 소제는 구약의 5대 제사 중 번제, 화목제 등과 더불어 제물 드리는 자가 자신의 생활 형편에 따라 그 마음에 기쁜 대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 사함 받기 위하여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의무제(義務祭)였다.

󰃨 소제(민하) - '선물' 혹은 '공물'(貢物)이란 뜻의 '민하'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를(favor) 얻기 위하여 드리는 예물을 가리켰다(창32:21 ;43:15). 그러나 후에는 받은 호의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을 뜻하게 되었다(Kell). 한편 구약의 5대 제사 중 소제가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른 네 가지 제사와 다른 독특한 특징은 다른 4가지 제사는 동물을 희생시켜 드리는 '피 있는 제사'이나 소제만은 피 없는 '곡물 제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소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즉 번제, 화목제 등과 같은 피 흘리는 제사들과 더불어 그 일부로서 함께 드려지는 소제의 경우가 있고(출 29:38,39;레23:12, 13;민 15:5-10), 또한 독자적으로 드려지는 경우가 있다. 소제는 주로 피 흘리는 제사의 부속적 제사로서 특히 번제와 더불어 드려졌으나, 본장에 나타난 소제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감사와 충성을 표현할 이유를 발견했을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던 독자적인 소제에 관한 규례이다(Matthew Henry). 소제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를 참조하라.

󰃨 고운 가루(쏠레트) - 기본 동사 '쌀라'는 '흔들다'란 뜻인데, 곧 이 말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운 가루를 골라내기 위하여 빻은 가루를 흔들었기 때문인듯하다. 한편 소제의 예물이 되는 고운 가루는, 먼저 인간과 관련되어 겉모습이 완전히 깨어진 후 순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상징하며(고후 4:10-12),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는 조금도 조악(粗惡)한 데가 없는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완전한 인성(人性)을 상징한다(히 4:15 ;요일 3:5).

󰃨 기름을 붓고 - 소제 예물의 종류로는 크게 '날 것'과 '요리된 것'이 있다. 요리된 예물의 경우에는 기름을 고운 가루(밀가루)와 '섞어야' 했지만(4-7절), 요리된 제물이 아닌 경우에는 단지 기름을 '붓기만' 했다(1,15절). 한편 여기서 기름(쉐멘)은 감람나무 열매로부터 짜낸 올리브기름을 가리키는데 영적으로 이 기름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 유향을 놓아 - 즉 '유향을 첨가하여'. 여기서 유향(레보나)은 감람과에 속하는 유향나무로부터 짜낸 고급 향료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첨가하는 이유는 제물이 향기를 풍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영적 의미에서 유향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이 향기는 성도의 아름다운 기도나 모범적인 생활(고후 2:15), 혹은 하나님 앞에 전적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향내 나는 아름다운 생애를 상징한다(엡 5:2).

2절 베헤비아흐 엘 베네 아하론 하코하님 베카마츠 미솸 멜로 쿠므초 미숄타흐 우미샤므나흐 알 콜 레보나타흐 베히케리브 하코헨 에트 아즈카라타흐 하미즈베하 이셰 레아흐 니호아흐 라아도나이

성 경: [레2:2]

레2: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주제1: [소제에 관한 규례 및 그 제물]

주제2: [고운 가루의 소제]

󰃨 고운 기름 가루 한 줌 - 소제물에는 5가지 종류가 있다. (1) 본절의 경우처럼 고운 기름 가루 한 줌으로 드리는 소제 (2) 화덕으로 구운 것을 드리는 소제(4절) (3) 번철에 부친 것을 드리는 소제(5,6절) (4) 솥에 삶은 것을 드리는 소제(7절) (5)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리는 소제(14절)등이다. 한편, 여기서 '한 줌'은 손에 가득(handful) 퍼담은 양을 가리키며 (Keil, Lange), 유대 랍비들의 주장처럼 단지 손가락으로 움켜 집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기념물(아즈카라). '기억하다'란 뜻의 '자칼'에서 유래한 말로, 곧 기념물이란 인간 편에서는 풍성한 소산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드리는 제물이란 뜻이요,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기억에 남을 만한 제물이란 뜻이다(시 20:3; 행 10:4). 따라서 기념물은 순수한 '여호와의 몫'으로서 '기념의 몫' 혹은 '기억의 몫'이라고도 한다. 한편 소제물 중 '아스카라'(기념물)로 취해지지 않은 나머지 소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되어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려졌다(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 1:9,13,17에서 이미 반복된 말로, 하나님께 불살라 바쳐지는 제물이 하나님 앞에 기쁘게 상달된다는 의미이다.

3절 베하노테레트 민 하민하 레아하론 우레바나이브 코데쉬 카다쉼 에미셰 아도나이

성 경: [레2:3]

레2: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주제1: [소제에 관한 규례 및 그 제물]

주제2: [고운 가루의 소제]

󰃨 그 소제물의 남은 것 - 즉 소제물 중 기념물로 취해져 여호와의 몫으로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한 줌의 고운 가루를 제외한 나머지 소제물을 가리킨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몫이 되어 그들에게 돌려졌는데, 제사장들은 이것을 회막의 거룩한 곳, 즉 회막 뜰에서 먹었다(6:16). 그러나 제사장 위임식 때 제사장들이 여호와께 바친 소제물은 모두 여호와의 몫이 되어 온전히 제단 위에서 불살라야 했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먹을 수 없었다(6:23).

󰃨 지극히 거룩한 것(코데쉬 카다쉼) - '거룩한 것들 중의 거룩한 것' 혹은 '거룩하고 또 거룩한 것'이란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여호와께 성별 된 모든 희생 제사 예물을 지칭할 때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경에서 특별히 이 용어를 반드시 적용시키고 있는 제물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즉 (1) 소제물 중 여호와께 기념물로 드려지고 남은 소제물(10:12) (2) 속죄제와 속건제 희생 예물 중 제단 혹은 진(陣) 밖에서 불태워지지 않은 제물(6:25-29; 7:6; 10:17) (3) 성소 북편에 비치된 전설병(24:9) (4) 분향단에 쓰일 향(출 30:36) (5) 그리고 특별히 구별되어 여호와께 봉헌된 모든 예물들(27:28)의 경우 등이다. 반면 이 용어를 적용시키지 않고 있는 경우는 (1) 번제물 (2) 위임식 때 제사장이 드린 소제물 (3) 그리고 기타 '여호와의 몫'으로 하나님께 돌려지는 희생 제물의 경우 등이다. 이처럼 이 용어가 같은 제물 중에서 구분되어 나타나는 이유는, 하나님께 돌려지는 제물의 경우 그것들은 완전히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졌기 때문에 그것들이 달리 다른 용도로 잘못 쓰일 가능성이 전혀 없었으나, 불살라지지 아니하고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지는 경우 그것은 규정 이외의 다른 용도로 잘못 쓰일 우려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를 주기 위하여 그와 같은 경우의 제물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는 말로 그 제물의 구별됨을 강조했던 것이다(C.F. Keil &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T. Vol. I, p.293).

4절 베키 타케리브 코르반 민하 마아페 하누르 솔레트 할로트 마초트 베룰로트 바쎄멘 우레키케 마초트 메슈힘 바솨멘

성 경: [레2:4]

레2:4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주제1: [소제에 관한 규례 및 그 제물]

주제2: [세 가지 소제물]

󰃨 화덕(탄누르) - 보통 진흙으로 만든 큰 가마솥을 가리키는데, 주로 떡이나 과자를 굽는 데 사용되었다(Lange, Kei). 굽는 방식은 타오르는 불로 가마를 달구어서 그 안쪽에다 밀가루로 반죽한 것을 붙이는 것이다(International BiblicalCommentary).

󰃨 무교병(할로트) -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떡이란 뜻으로 '찌르다', '구멍을 뚫다'란 뜻의 '할랄'(*)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무교병은 가운데 구멍이 뚫린, 효소제 없는 두껍고 바삭바삭한 과자류를 가리킨다. 무교전병(레키킴) - '때리다', '두들겨 펴다'란 뜻의 '라카크'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무교전병이란 무교병 보다 얇고 둥글넓적한 과자를 가리킨다.

5절 베임 민하 알 하마하바트 코르바네카 솔레트 벨룰라 바쎄멘 마차 티흐예

성 경: [레2:5]

레2:5 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주제1: [소제에 관한 규례 및 그 제물]

주제2: [세 가지 소제물]

󰃨 번철(마하바트) - 쇠로 만든 큰 냄비형 철판(plate)을 가리킨다(겔4:3). 즉 이것은 무교병이나 무교전병을 크고 둥글넓적한 모양으로 얇게 굽는 데 사용되는 쇠 철판으로써 지금도 아랍인들이나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는 기구이다. 그들은 그것을 '타인'(tajen)이라고 부르는 데, 분명 이 말은 '마하바트'에 대한 70인 역의 번역 '테가논'과 밀접히 연관된 명칭이다(L-ange, Keil). 한편, 이 쇠판은 본래 잦은 이동을 해야 하는 유목민들 사이에서 사용되던 것인데, 후에는 농경 정착 사회에서도 사용되었다(G. Dalman).

󰃨 누룩을 넣지 밀고 - 누룩은 신속히 발효되는 그 성질로 인해 성경에서 주로 죄의 재빠른 전염성과 그로 인한 부패를 상징한다(마 16:6,12; 고전 5:8). 따라서 여호와께 드리는 거룩한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을 수 없었다.

6절 파토트 오타흐 피팀 베야차케타 알레이하 솨멘 민하 히

성 경: [레2:6]

레2:6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 

주제1: [소제에 관한 규례 및 그 제물]

주제2: [세 가지 소제물]

󰃨 조각으로 나누고 - 이것은 하나의 둥글넓적한 무교병을 여러 조각으로 나눔으로써 하나님께 보다 정성된 소제를 드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비슷한 관습으로 오늘날 베드윈 족속들(Bedouins)은 손님을 대접할 때 뜨거운 번철에서 갓 구워낸 떡 덩이를 여러 조각으로 잘게 나눈 후 그 위에 버터와 기름을 부어 준다(Keil).

7절 베임 민하트 마르헤쎄트 코르바네카 솔레트 바쎄멘 테아세

성 경: [레2:7]

레2:7 네가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

주제1: [소제에 관한 규례 및 그 제물]

주제2: [세 가지 소제물]

󰃨 솥에 삶은 것 - 이것은 화덕에 구운 것 및 번철에 부친 것과 더불어 유향 없이 단지 단지 가루와 기름만으로도 하나님께 소제물로 바칠 수 있었다. 이처럼 비싼 유향 없이도 소제의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셨다. 이와 같이 모든 제사의 종류와 방법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만유의 소유자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고 계신 것은 실로 예물 드리는 자의 자발적 헌신과 충성뿐이라는 사실이다.

8절 베헤베타 에트 하민하 아쎄르 예아세 메엘레 라아도나이 베히케리바흐 엘 하코헨 베히기솨흐 엘 하미즈베아흐

성 경: [레2:8]

레2:8 너는 이것들로 만든 소제물을 여호와께로 가져다가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가서 

주제1: [소제에 관한 규례 및 그 제물]

주제2: [세 가지 소제물]

󰃨 이것들로 만든 소제물 - 곧 4-7절에서 언급된 바 고운 가루와 기름으로 만든 세 가지 종류의 요리한 소제물을 가리킨다. 즉 그것들은 화덕에 구운 것(4절), 번철에 부친 것(5절), 솥에 삶은 것(7절) 등인데 이 소제물들에는 유향 없이 단지 기름과 소금만 첨가되었다.

9절 베헤림 하코헨 민 하민하 에트 아즈카라타흐 베히케티르 하미즈베하 이셰 레아흐 니호아흐 라아도나이

성 경: [레2:9]

레2:9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주제1: [소제에 관한 규례 및 그 제물]

주제2: [세 가지 소제물]

󰃨 화제(火祭) - 히브리어 '이셰'는 '태움'(burning), '불사름'(firing)이란 뜻으로, 곧 '불살라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5대 제사 종류와는 달리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거제, 요제, 전제 등과 더불어 제사를 드리는 4대 방법 중 하나로서 고대로부터 가장 보편적으로 취해졌던 제사 형태이다. 한편 여기서 거제(擧祭)란 제물을 높이 들어서 바치는 제사를 가리키고, 요제(搖祭)란 제물을 위아래로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를 가리키며, 전제(奠祭)란 포도주, 기름, 피 등을 부어서 드리는 제사를 각각 가리킨다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 이 말은 화제로 드려지는 소제물의 연기 속에 예물 드리는 자의 자발적인 충성과 헌신이 함께 어우러져, 그것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때 하나님께서 그 충성된 마음을 보시고 기뻐 하사, 죄로 인해 유발된 모든 진노를 기꺼이 푸신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향기로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호아흐'의 기본 개념에는 (진노를 풀고)'쉬다', (화를 가라앉히고) '휴식하다'란 뜻이 있기 때문이다(9절). 이로 볼 때 구약 시대로부터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신 제사는 순종의 제사요, 헌신의 제사였으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치는 자발적인 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

10절 베하노테레트 민 하민하 레아하론 우레바나이브 코데쉬 카다쉼 메이셰 아도나이

성 경: [레2:10]

레2:10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주제1: [소제에 관한 규례 및 그 제물]

주제2: [세 가지 소제물]

󰃨 소제물의 남은 것 - 2:3 주석 참조.

󰃨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니 - 소제의 제물 중 여호와께 불살라 바쳐야 하는 여호와의 몫은 한 줌의 기념물(아즈카라) 부분이며(2절), 제사장의 몫은 그 나머지 부분이었다(3절). 여기서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진 소제물을 일컬어 '지극히 거룩한 것'(코데쉬 카다쉼)이라 부르며(3절), 이것은 제사장들의 양식으로 쓰였다. 즉 제사장들은 이것을 성막 거룩한 곳(회막 뜰)에서 먹었는데(6:16-18), 일반 백성들이나 심지어 제사장 아닌 레위인들 조차도 그런 지극히 거룩한 음식을 먹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Keil).

율법 준수에 대한 결단(시 119:1-8)

[시편 119편 히브리어 강해] 율법 준수에 대한 결단(시 119:1-8)

안녕하세요. 오늘은 시편 119편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율법 준수에 대한 결단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시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알파벳 시입니다. 시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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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물은 크게 생밀가루의 소제물과 요리를 한 음식 소제물로 나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누룩을 써서는 안 됐다. 소제물의 종류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 소제물

고운 밀가루+기름+향

요리한 소제물

화덕에 구운 것

기름을 섞은 것

기름을 바른 것

철판에 부친 것

냄비에 요리한 것


화덕과 냄비와 철판은 모두 고대 이스라엘의 가정에서 사용한 요리 기구들이다. 생밀가루 소제물이든 음식 소제물이든 제사장은 한 움큼을 떠서 제단에 올려 태운다. 나머지 부분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 때 그 태워지는 한 움큼을 ‘기념물’(히. 아즈카라)이라 부른다. 히브리어 ‘아즈카라’는 동사 자카르(zaqar ‘기억하다’)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아마도 그 태워지는 부분은 하나님의 보살핌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소제에서 가장 중요한 주의할 점이 있다. 제단 위에 바치는 소제물의 경우 어떤 경우라도 누룩과 꿀을 소제물에 첨가해서는 안 된다(레 2:11). 누룩(히. 하메츠)은 재료를 발효시키는 효모를 말한다. 그런데 꿀을 뜻하는 히브리어 데바쉬(debash)는 벌꿀이나 과일 시럽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꿀이 이방 제의에서 사용되어서 금지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방의 제단에 바쳐진 밀가루, 향, 기름과 소금도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채취되는 벌꿀은 농산물이 아니므로 자동적으로 제단에서 배제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과일 꿀의 사용을 금지했다고 보는 편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이런 점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목축(젖)과 과일 농사(꿀)가 매우 잘되는 땅이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누룩이 금지되는 이유는 변질과 부패라는 부정적 변화를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마 16:6; 눅 12:1; 고전 5:6; 갈 5:9). 벌꿀과 달리 과일 꿀도 과일을 갈아서 만든 것이라 쉽게 변질되며 그래서 금지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질의 상징성은 이어지는 ‘소금을 반드시 넣으라’는 상반된 명령에서 유추할 수 있다. 소금은 누룩과 정반대로 반부패와 불변성을 상징한다. 소금이 지닌 강력한 방부제로서 변질이 안 되는 특징으로 인해 고대 중동에서 소금은 동맹, 친목, 약속, 충성의 맹세에 사용되었다. 바벨론에서는 부족 간 동맹을 맺기 위해 양자가 소금을 먹었으며, 페르시아 왕실에서는 신하들이 왕 앞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며 소금을 먹었다(참조. 스 4:14). 유목민인 베두인 사이에서는 상호 동맹과 보호의 표시로 소금을 먹는 관행이 있었는데, ‘우리 사이에 소금이 있다’는 그들의 격언에 단단히 결속된 그들의 우정이 드러난다. 이것이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배경일 수 있다(막 9:50). 특별히 소금이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으로 묘사된다(레 2:13). ‘언약의 소금’은 분명히 ‘소금 언약’(민 18:19; 대하 13:5)과 관련되어 있는 의미있는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레위기 2장 13절에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라고 명시된 것으로 보아 소제물 뿐 아니라 모든 짐승의 제물에도 소금을 쳤을 것이다(겔 43:24). 그렇다면 제단에 제물을 올릴 때마다 언약의 소금을 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언약, 곧 그들과 하나님의 변치 않는 결속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변치 않는 ‘소금 언약’이며 제물에 들어가는 소금은 그 언약을 상기시키는 ‘언약의 소금’이다.



 

다. 화목제(和睦祭=셀렘)

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한 제사로서 예수님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어주시는 제사입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며 콩팥과 기름과 간 꺼풀을 번제 단 위에서 불사르는 제사로서 하나님께 반드시 열납되도록 명령하신 제사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온전한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그림자로, 모형을 보이시는 내용입니다. (레위기 19장 5-8절에 화목의 제사법 설명이 있음)

화목제로 드린 제물의 나머지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어라는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나머지 제물을 삼일 만에 먹지 못하고 남을 경우 모두 불사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사 제물로는 생축의 초태생인 숫컷과 암컷을 드립니다.

화목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배려하는 산비둘기, 집비둘기의 새끼는 제물을 받지 않는 평등의무 제사였습니다. 즉 성막을 지을 때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똑 같은 속전을 거두시게 하신 것처럼, 평등하게 부담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먼 여행길서 돌아와 사람들과 기쁨을 나눈 수평적 제사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 유지하며 공동체의 친목과 화해 강화했다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요아킴은 먼 여행길을 떠났다. 사해에서 캔 소금 덩어리를 다메섹에 가서 팔면 가족들 일년 생계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영세했던 요아킴 일행의 여행 장비는 빈약했으며 낙타와 노새는 노쇠했다. 300km가 넘는 여행길은 어려웠다. 큰 강을 만나 떠내려갈 뻔 했고, 뜨거운 광야 길을 건널 때는 길을 잘못든 바람에 물이 고갈되어 쓰러질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를 불과 하룻 길 앞둔 어느 날, 일행은 산적떼를 만났다. 모든 것을 빼앗길 찰나였다. 그 때 어디선가 갑자기 십수명의 군인들이 나타나 극적으로 그들을 물리쳐주었다. 그들은 임무를 마치고 마침 다메섹으로 복귀하고 있던 참이라 했다. 참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의 천군천사들이었다. 힘든 여행길을 마치고 요아킴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금도 좋은 값으로 팔아 당분간 넉넉히 살 수 있게 되었다.


요아킴은 하나님께 바칠 번제의 양과 화목제 소를 각각 한 마리 씩 고른 후 당장에 성전으로 달려갔다. 자신의 여행길에서 함께 해주신 하나님, 여러 차례 위기의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바치고 친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기쁨의 잔치를 베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번제를 감사의 제물로 먼저 바친 후, 요아킴은 화목제를 또한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제사 규례를 따라 번제의 양은 남김없이 모두 태워져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올라갔다. 이어서 화목제의 수소는 내장의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 그리고 간엽을 도려내 바친 후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는 수고하신 제사장님 몫으로 드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몸통을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요아킴은 마을 사람 모두를 불러 그 화목제 짐승으로 불고기 파티를 열었다. 그 동안 껄끄러운 관계였던 친구 시므온도 초대를 받고선 기꺼이 기쁨으로 달려와 주었다. 즐겁게 고기를 삶고 구워 먹으며 요아킴은 여행길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셨는지 간증을 들려주었다. 감사가 풍성히 넘쳤다. 간증을 들은 다른 사람들도 또한 최근에 있었던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여 나누었다. 잔치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찬양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시편의 찬양을 노래했다. 그 순간 요아킴과 시므온을 비롯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화목하고 하나가 되었다.


화목제의 특징


위험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요아킴이 바친 제사는 번제와 화목제였다. 번제는 여러 목적으로 바쳤지만, 가장 대표적인 자원의 제사로서 감사의 제물로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흔하게 화목제가 수반되었다. 번제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제물이었다면, 화목제는 하나님께 일부 바치고 나머지 대부분은 사람이 함께 나누기 위한 제물이었다. 따라서 번제가 수직적인 제사였다면 또 하나의 감사의 제물이었던 화목제는 주로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기 위한 수평적인 제사였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3장에서 규정된 화목제의 히브리어는 쉘라밈(shelamim)이다. 이 단어는 분명 ‘샬롬’에서 기원한 것이다. 샬롬은 평화와 친교, 다시 말해 관계가 좋은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화목제는 영어 성경에서 ‘평화의 제사’(peace offering)나 ‘친교의 제사’(fellowship offering)로 번역한다. 흔히 알고 있는 대로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미 ‘화목한 관계’를 감사하며 기뻐하기 위해 바친다.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졌을 경우 관계를 복원하여 ‘화목’하고 화해하기 위한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죄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감사의 번제나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미 화목한 관계 속에서 교제를 지속하고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바치는 제사다. 화목제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과 고기를 나누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에 소, 양, 염소를 암수 구분 없이 화목제로 바칠 수 있었다. 비둘기는 제외되었는데 고기를 나누기에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다. 양과 염소는 아마 가족과 친족들만 초대해서 나누었던 반면, 소를 잡을 때는 마을 잔치가 벌어졌을 것이다. 어느 것을 바칠 지는 자신의 형편과 감사의 정도에 따라 제사자 본인이 결정할 수 있었다. 화목제의 가장 큰 특징은 짐승의 일부만 하나님께 바치고 나머지는 전부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는 점이다. 이때 하나님께 바치는 부위는 내장 부위의 기름 덩어리(suet), 두 콩팥, 그리고 간엽(liver lobe)이었다. 흔히 히브리어 요테레트 카베드(yoteret kabed)를 간꺼플로 번역하는데 그런 얇은 막이 제물에 적합했을리 없다. 랍비들은 그것을 ‘간의 손가락’, 다시 말해 간의 어느 한 토막으로 번역한다. 그것은 간 중에서 ‘미상엽’이라는 부위로 알려진다. 콩팥과 간엽을 바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그 기관들이 인간의 감정이 집약되는 기관, 즉 감정의 좌소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특히 간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간점술을 금지하기 위해 제단에 바치라고 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콩팥은 단순히 기름 덩어리에 묻혀 있기 때문에 기름과 한 덩어리로 취급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화목제에서 태워지는 이 부위들을 단순히 ‘기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레 6:12; 왕상 8:64; 대하 7:7; 사 1:11). 그리고 짙은 빨간 색의 간에 대해서는 고대인들에게는 그 기관이 피를 만드는 기관으로 간주되어 ‘피는 곧 생명’이며 하나님께 돌려야하기 때문에 간이 요구되었다는 설명이 가장 그럴 듯 하다.



▲ 고대 팔레스타인 양의 거대한 꼬리와 꼬리를 위한 수레

양의 경우는 특별히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를 잘라 바치라는 규정이 더해졌다(레 3:9). 꼬리가 두툼하고 묵직한 것이 팔레스타인 양의 특징이다. 최근에는 그런 양을 보기 힘들지만,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어떤 양은 꼬리가 너무 거대한 나머지 바퀴가 달린 수레를 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기름진 꼬리는 미골을 절단하여 제단에 바쳤다(레 3:9). 그러나 염소 꼬리나 소 꼬리는 기름이 아닌 고기 덩어리이므로 제단에 바치지 않았다(레 3:3-4, 14-15).


이렇게 기름과 일부 내장을 제하고 남은 고기(아마 남은 내장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는 제사장 몫으로 일부를 떼어낸 뒤 제사자가 가져가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제사장의 몫은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 나머지는 모두 제사자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왜 짐승의 기름을 여호와께 바쳤을까? 이에 대해서는 기름이 가장 맛있는 부위였다거나 콜레스테롤 덩어리라 인체에 해로워 제물로 바쳤다는 설이 있다. 기름에 잘 타는 부위인 만큼 제물의 소각을 도왔을 것이라는 실용적 이유를 내세우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밀그롬이 말한 대로 내장에 엉긴 지방 덩어리는 고기 위에 붙은 비계와 달리 먹을 수 없는 부위다. 또한 콜레스테롤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관점은 현대 의학의 발달과 함께 등장했으며, 과하게 섭취하지 않는 이상 콜레스테롤은 반드시 필요한 영양소다. 또한 해로운 것을 바치라했다는 견해는 ‘기름은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신 데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제물이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데 있어서 기름이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기름이 부와 풍요의 상징이자 힘의 근원으로 간주되었기에 풍요와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화목제를 드리는 때


번제와 마찬가지로 화목제 역시 자발적인 제사였기에 개인은 원하면 언제든 화목제 짐승을 바칠 수 있었다. 화목제는 월삭이나(민 10:10) 오순절 같은 일부의 절기에 공적 제의로 바쳐지는 경우를 제외하면(레 23:19) 매우 사적인 성격이 강한 제사였다. 민수기 29장 39절에 따르면 절기마다 바친 화목제는 절기법으로 규정되어 있기보다는 잔치를 위한 자발적 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참조. 대하 7:7). 또한 특별한 행사나 국가적 행사에서도 화목제를 풍성하게 드렸다(민 7장; 삿 20:26; 삼상 11:15; 대하 7:7; 30:22; 31:2). 화목제는 레위기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께서 전수해주셔서 바쳐지던 제사였다(예, 출 18:12). <표>



a. 감사제/찬양제: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거나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 질병에서 회복되었을 때처럼 특별한 축복으로 인해 드리는 화목제였다. 감사의 화목제를 드릴 때 당일에 고기를 먹었다는 점으로(레 7:15) 미루어보면 감사의 기쁨이 충만했을 때 모든 고기를 즉시 먹는 것이 바람직했다.


b. 서원제: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을 이행할 때 드리는 제사다. 한나가 아들 사무엘이 젖을 뗀 뒤 성전에 데리고 올라가 서원을 실행하며 수소 세 마리(혹은 삼년생 수소 한 마리)를 서원제로 바친 것(삼상 1:24)이 그 예다. 서원의 화목제 때는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고, 종종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화목제와 더불어 번제를 함께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레 22:18).


c. 자원제/낙헌제: 특별한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기쁨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화목제였다. 이때도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 경우 순전히 자발성에 의해 바치는 제사였던 이유로 짐승의 발이 더하거나 덜한(아마도 짧거나 긴) 약간의 흠이 있는 짐승도 바칠 수 있었다.


화목제의 고기는 지정된 기한 이후로는 거룩성을 상실하여 더러운 고기(히. 피굴)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일정 기간 후에 제의적으로 부패한 고기나 부정한 것과 접촉한 고기를 먹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케 하는 심각한 죄였기에 그런 고기는 진 밖에서 불살라 없애야 마땅했다. 또한 부정한 사람들이 속죄제의 고기를 먹으면 끊어지는(cutting off) 형벌을 받았다(레 7:18~20). 이는 아마 공동체에서 제명된다는 의미일 텐데, 고대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죽음과도 같았다.


화목제의 의의


화목제는 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다. 화목제는 번제와 같이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이를 기뻐하는 감사의 제사라 할 수 있다. 화목제는 기쁨을 이웃과의 교제 속에서 나누는 일종의 잔치의 제사다(레 7:11~21).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큰 일을 겪은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이때 다른 사람과 반목 관계에 놓인 것이 매우 사소해 보일 수 있다. 이때 화목제를 바치면서 공동체의 친목이 강화되고 불편한 관계에 놓인 사람들도 특별한 축제로 인해 화해의 관계로 복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화목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만드는 부수적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은 예배에서 번제적 요소, 즉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경배만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번제) 못지않게 사람 간의 수평적 교제(화목제)도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제사의 정신은 예배를 통해 실현되어야 마땅하다. 예배 시간은 짧지만 최대한 성도 간의 축하, 감사, 위로 및 합심의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가 풍성한 교제와 나눔의 자리가 되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다. 부족한 화목제의 요소는 예배 후 식사와 교제, 구역 예배나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채울 수 있다. 더불어 신자들은 자신의 물질을 화목제의 정신을 따라 이웃과 넉넉히 나눌 수 있어야할 것이다. 비단 물질만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데 우리의 시간과 힘, 또한 지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에 앞서 성도들끼리의 나눔과 화해를 크게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에 따르면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함과 동시에 성도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현하는 중요한 예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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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속죄제(贖罪罪=사이르)



부지 중에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해 드려지는 속죄제는 의무제사입니다. 이 제사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시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속죄제의 제물에 대해 차등을 둔 제사입니다. 즉 제물과 예물에 각자의 경제적 사정을 고려하여 화목제와는 다르게 적용했습니다.

- 제사장 자신과 회중의 죄는 수송아지, 족장은 숫염소, 평민은 암염소나 어린 암양,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 극빈자는 고운가루 3분의 1을 드리게 하였습니다.

- 방법으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속죄제의 제물에 안수하여 자신의 죄를 그 동물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죄를 전가 받은 제물이 처참하게 죽은 모습을 보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하시는 제사인 것입니다.

- 레위기의 4장과 5장에서는 제사장이신 아론이 속죄제의 제물인 두 염소를 가져다가 제비를 뽑아서 한 마리는 죽여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한 염소는 살려서 아사셀위하여 두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 위에 안수하여 유대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에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무인지경인 광야로 보내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아사셀 염소는 속죄의 제물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즉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죽을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4장 1-9절에서는 문둥병자를 위해 두 마리 새 중 한 마리는 제물로 쓰고, 다른 한 마리는 죽은 새의 피를 발라 들에 날려 보내면 문둥병자가 깨끗하다는 선언을 받게 됨)

- 속죄제는 제물의 피를 처리하는 방법도 작은 비둘기라도 반드시 피를 흘리도록 하여 제사장이 이 피를 취해서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에 피를 묻혀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리게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의 피가 없이는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심코 지은 비고의적 죄 ‘피뿌리기’ 방식으로 속죄하다


죄의 공개적 인정과 자백이 중요 … 최종적 효과는 ‘죄사함’ 이었다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요아킴은 최근 태어나 가장 정신없는 한달을 보냈다. 딸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른 뒤 며칠 못가 지병을 않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겨우 장례식을 마친 뒤 한숨 쉬려는가 했더니 최근 사업을 함께 시작한 동업자 녀석이 모든 물건을 빼돌려 도망을 가고 말았다. 요아킴은 쉴 겨를이 없었다. 그 녀석이 두로 항으로 도망간 뒤 배에 오르면 끝장이었다. 서둘러 추적을 떠난 요아킴은 이틀을 노숙한 뒤 삼일 째에도 이른 아침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다. 요아킴은 반나절이 지나 어느 마을에 도착한 뒤에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련의 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바람에 안식일 날짜를 망각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가슴이 덜컹거리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요아킴은 그 자리에서 무릎 꾾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죄가 해결될 수는 없었고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아킴은 그 범죄자가 배에 승선하기 직전 체포할 수 있었다. 재산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온 요아킴은 안식일을 무심코 범했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즉시 성전으로 올라가야 했다. 더불어 그에게는 추가로 드려야할 제물이 있었다. 바로 잃었던 재산을 되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번제와 화목제였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제사는 속죄제였다. 죄를 용서받지 않고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리 없기 때문이다.


무심코 지은 죄를 위해 바친 속죄제


요아킴이 안식일을 무심코 범한 뒤 바친 제사는 ‘속죄제’였다. 속죄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였다. 첫째, ‘비고의적인 죄’를 해결하고(레 4~5장) 둘째,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했다(레 11~15장). 예컨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산후 정결례를 거쳐 깨끗케 되는데, 일정 기간 날짜가 지난 뒤 목욕을 해야 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자녀 출산에 대한 감사의 번제와 더불어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레 12장을 다룰 때 설명할 것이다). 덧붙여 유출병 걸린 여자가 피가 멈춘 뒤, 또는 악성 피부병(나병이라는 번역은 잘못이다) 환자가 치료된 뒤 반드시 바쳐야하는 것도 속죄제다. 사람이 부정을 탔을 때 그것은 죄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죄제가 요구된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그것은 그런 다양한 부정결들은 창세기 3장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발생된 죄의 증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부정결의 문제도 근원을 따지면 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속죄제가 요구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우선 속죄제는 속건제와 더불어 ‘죄’를 해결하는 제사였다. 속건제가 해결하는 죄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죄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속죄제가 다루는 죄와 차이가 난다. 속건제에서는 상대방의 금전적/물질적 손해를 배상하고 하나님께 속건제 숫양을 바쳐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도덕적 계율을 어긴 죄인데, 다만 그 죄는 ‘비고의적인 죄’ 다시 말해 ‘그릇’ ‘무심코’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을 범한 죄다. 한글 성경에서는 단순히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는 정확히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 중 하나라도’이다. 고의적인 죄의 경우는 일부 고의성이 가벼운 경우를 제외하고(레 5:1~4) 매우 심각하여 속죄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반역죄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징벌하셔서 처단하시거나(예, 레 10장의 잘못된 제사를 드린 나답과 아비후) 하나님의 지시로 백성들이 처형을 했다(예, 레 24장의 하나님을 저주한 이스라엘 평민). 다만 어떤 반역죄의 경우 심판이 유보되어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도 했다.


어쨌든 금지 명령은 매우 중대한 계명이다. 따라서 무심코 위반했다 하더라도 상당히 심각하다. 요아킴의 경우 안식일에 여행이 절대 금지되어 있으나 그는 무심코 이 금지 명령을 위반했다. 속죄제를 바쳐 죄가 속죄되어 하나님께 용서받아야만 했다. 요아킴은 평민이었기 때문에 바쳐야하는 속죄제 짐승은 암염소나 암양이었다.


속죄제는 짐승의 피로 성전과 그 기물들의 오염을 씻어내는 효과를 낸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인간의 죄와 부정결이 성전과 그 기물들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속죄제는 죄와 부정결의 문제를 위해 바치는 것이 원칙이나, 그 외에도 제사장 임직이나 레위인의 임직, 또는 나실인의 서원과 같은 몇 가지 특별한 예식에 속죄제를 드렸으며, 국가적 절기마다 다양한 속죄제를 바치곤 했다. 그 기능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의견이 나뉘는데 그중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아마도 절기별로 제단과 성전의 잠재적 부정결을 닦아내는 기능을 했을 것이란 견해다.


속죄제와 속건제, 특히 속죄제는 그 제사의 특징과 의미, 제사의 절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서는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야하는 아쉬움이 있다. 상세한 설명과 목회적 적용과 여러 힌트, 특히 속죄제의 자세한 교회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새물결 플러스)의 도움을 받기 바란다.

 

신분에 따라 등급화된 속죄제


속죄제는 죄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랐다. <표>는 높은 지위로부터 낮은 지위에 이르기까지 제물의 크기와 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4장에서 먼저 (대)제사장의 비고의적인 죄에 대해 수소를 바칠 것을 명령한다. 많은 학자들이 3절의 ‘기름부음받은 제사장’을 대제사장으로 해석하지만, 만일 그렇게 될 경우 제사장이 목록에서 누락되므로 이것은 분명 대제사장을 포함한 제사장들로 보아야 한다. (대)제사장과 회중은 동급이었다. 따라서 둘 다 수소가 요구된다. 이때 회중은 제사장이 포함된 회중을 의미한다. 만일 제사장과 회중이 분리되어 취급되는 경우, 제사장이 제외된 회중의 제물은 흔하게 숫염소였다(레 9장; 16장). 족장은 평민의 지도자로서 숫염소를 속죄제로 바쳤고, 평민은 암염소나 암양을 바쳤다. 여기서 수컷이 암컷보다 제의적 가치 면에서 우위에 놓여 있음이 다시 확인된다(시장 가치로는 암컷이 월등히 비쌌다). 한편, 제사장과 평민 사이에는 레위인이 있어야 하는데 레위기 4~5장의 목록에서 빠져있다. 아마 레위인은 제사장과 평민 사이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족장과 동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양과 염소를 조달하기 어려운 가난한 계층을 위해서는 비둘기 두 마리가 속죄제로 바쳐졌다. 이때 한 마리는 번제와 같이 모두 제단에 태웠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제단에 흘린 뒤 제사장이 섭취하는 방식으로 두 비둘기가 처리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계층 중에는 심지어 비둘기마저 힘에 겨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극빈자들이 무심코 죄를 범했을 경우에도 죄 문제를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수단을 그들에게 허락하셨다. 바로 그들이 평소 음식으로 먹는 밀가루 1/10에바(약 2.2리터)를 소제의 속죄 제물로 가져오라 명하신 것이다(레 5:11~13).


경제적 형편과 무관하게 죄의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해결되어야 했다. 비록 밀가루는 피가 없는 속죄 제물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재량으로 극도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밀가루 제물에 피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주셨다. 마지막 한 사람을 위해서까지 속죄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매우 특이한 속죄제의 피뿌리기


속죄제의 피 의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는 안수 후 도살을 한 뒤 그 피를 양푼에 받아 내성소로 가지고 들어간다. 거기서 양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은 뒤 지성소 휘장 앞의 향단 주변에 ‘뿌리고’ 향단의 네 뿔에 ‘발랐다’(레 4:6~7, 17~18). 그러나 평민을 위한 속죄 제물인 염소와 양의 피는 마당에 놓인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른다’(레 4:25, 30). 비둘기의 경우에 피를 양푼에 받지 않고 죽인 뒤 몸채 들고 마당의 번제단 벽에 일부를 뿌리고 남은 피는 제단 아래 흘렸다(레 5:9).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의 피는 내성소에 들어가 향단에 처리한 반면, 평민의 속죄제 짐승(염소와 양, 비둘기)의 피는 마당의 번제단에서 처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분에 따른 죄의 오염력과 영향력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회중의 죄의 ‘독기’는 내성소까지 침범해 향단을 더럽힌 반면, 평민의 죄는 마당의 번제단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이유로 피를 뿌리는 위치가 달랐다.


<표>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피를 어디에 뿌렸느냐에 따라 속죄제 고기 처분 방식도 달라졌다. 내성소에서 피를 뿌린 짐승의 경우 결코 그 고기를 제사장이 먹지 못하고 진영 밖의 재를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소각을 해서 없앤다. 반면에 마당의 번제단에서 피가 처리된 속죄제 짐승의 고기는 제사장들에게 일종의 수고비로 건네져 그것을 먹어서 없앴다. 이것은 분명히 속죄제 고기의 오염도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내성소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피를 통해 흡수된 오염이 강해 먹을 수 없어 밖에 반출해 태웠던 반면, 마당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그 오염이 경미해 제사장이 먹을만 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들이 먹도록 조치하시고 밖에 버려 태우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속죄제는 ‘태우는 속죄제’와 ‘먹는 속죄제’로 나뉜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특유의 동작은 아래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진다. 우선 속죄제 외의 다른 모든 제사들, 즉, 번제/속건제/화목제에서는 피를 뿌리는 방식이 공통적으로 ‘끼얹다’(zaraq ‘dash, throw’)이다. 피를 양푼에 받은 뒤 제단 사면 벽에 뿌려서 처리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피를 양푼에 담은 뒤 다음 세 가지 동작을 통해 피를 처리한다.


a. ‘뿌리다’(히자-hizza ‘sprinkle’): 손가락으로 제단 주변에

b. ‘바르다’(나탄-natan ‘daub, put’): 손가락으로 제단의 네 뿔에

c. ‘쏟다’(샤파크/야차크-shapak/yatsak ‘pour’): 제단 밑에


속죄제에서는 피가 든 양푼을 들고 제단 벽에 끼얹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양푼에 담아 피를 찍은 뒤 소량의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거나 제단 뿔에 바르는 동작으로 피를 처분한다. 피가 대량으로 남는데, 이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는다. 여기서 손가락으로 피를 뿌리고 바르는 동작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가져오는 효과는 제단의 정화이기 때문이다(레 8:16; 16:19). 즉, 속죄제의 피를 특이한 동작으로 뿌리고 바를 때 제단과 성전이 청소된다. 이것이 속죄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죄의 자백이 요구됨


레위기 5장 1~6절은 약간의 고의성이 있는 죄들을 위해 바치는 속죄제 규정이다. 네 가지 사례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모두 고의성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그 죄의 공개적인 인정과 자백이 요구된다. 이런 죄의 인정과 자백은 속죄제 절차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것 없이는 속죄제는 아무런 효력이 발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이 경우는 고의성이 있기 때문에 더 죄질이 나빠 ‘자백’이 요구되었지만, 4장의 죄들은 ‘비고의적’인 죄들이 때문에 죄질이 가벼워 자백이 요구되진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4장에는 ‘자백’의 요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4장은 ‘금지명령’이기 때문에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심코 그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심각했다. 따라서 자백은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수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4장에서는 자백을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속죄제의 최종적 효과는 ‘속죄’와 그로 인한 ‘죄사함’이었다(레 4:20, 26,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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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마. 속건제(=아샴)

성물과 이웃에게 해를 가한 것을 용서받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흠이 없는 숫양으로 드려 하나님의 성물을 범한 죄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범죄를 저질렀거나 실수를 하여 하나님의 금령을 어긴 자는 제물과 함께 그 이웃에게 20%에 준한 배상을 하게 한 제사입니다. 이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힘써야 되지만 동시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항상 화합하는 노력을 요구하는 제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사보다는 먼저 형제와의 화목을 이루라고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 23-24절의 의미는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온전한 헌신의 제사를 받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물을 취한 범죄자, 훔친 것 배상하고 숫양을 바치라


재산상 피해를 발생시킨 죄 해결 위한 제사 … 죄인의 자수 유도했다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요아킴은 가족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올라갈 일이 있었다. 그는 친구 제이콥에게 중요한 물건들을 몇 가지 맡긴 뒤 집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맡긴 물건은 약 100세겔 정도의 귀중품이었다. 제이콥은 염려하지 말고 다녀오라면서 귀중품들을 자신의 집에 따로 보관했고 요아킴의 집을 자물쇠로 잠군 뒤 다른 사람들이 침입하는지 계속 확인했다. 당시 제이콥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요아킴의 귀중품들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한달 후 요아킴의 가족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요아킴은 제이콥에게 맡겼던 물건을 돌려 달라 부탁했다. 감사의 표시로 사례는 넉넉히 할 참이었다. 그런데 제이콥은 자신은 그런 귀중품들을 맡은 적이 없고 집만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시치미를 뗐다. 평소 절친했던 이웃에게 배신을 당한 요아킴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법정으로 이 문제를 가져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분명한 물증이 없기에 그 사기꾼에게 재산을 찾을 방법이 그리 마땅치는 않았다.


일주일이 지난 뒤 제이콥의 아내는 물건을 되돌려주라고 남편을 설득했다. 제이콥은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요아킴을 찾아가 자신의 파렴치한 범행을 인정하고 죄를 자백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자수와 죄의 자백 후 물건을 돌려주는 것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었다. 남의 재산을 가로챘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의 남용한 잘못된 맹세로 하나님께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제이콥은 속건제 규정을 따라 원금 100세겔 값어치의 물건들에 20%를 더해서 갚아주었다. 다시 말해, 그는 그 귀중품에 덧붙여 20세겔을 물어줘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속건제 규정은 물질의 배상과 더불어 속건제를 위한 숫양을 성전에 바칠 것을 요구한다. 제이콥은 규정을 따라 성전으로 올라가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바쳐야 했다.


물질적 배상에 초점을 두는 속건제


제이콥이 자수한 뒤 바친 그 제사는 속건제다. 히브리어로 아샴(asham)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물질의 배상을 가리키는 단어다. 따라서 구약성경 여기저기에서 물질적 배상을 위해 바쳐지는 다양한 제물들이 속건제로 번역되곤 한다. 그러나 레위기 5장 14절~6장 7절에서 규정되는 속건제는 희생 제사로서 바치는 속건제를 말한다. 영어 성경은 전통적으로 guilt offering으로 명명하지만 최근의 영어 성경들은 히브리어 아샴에 배상의 의미를 지닌 이유로 배상제(reparation offering)로 번역한다. 속건제의 건(愆)은 ‘허물 건’으로서 벗겨내야 할 과실을 의미한다. 앞서 속죄제에서 간단히 설명한대로 속건제가 여호와의 금지 명령을 무심코 어긴 죄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라면, 속죄제는 재산상의 피해를 발생시킨 죄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다.


속건제가 요구되는 죄로 피해를 입은 재산은 여호와의 재산과 사람의 재산으로 나뉜다. 특별히 이 죄는 히브리어 마알(maal)로 지칭되는데, 이 죄는 여호와에 대한 믿음의 위반을 의미한다. 레위기 6장 2절의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라는 표현은 속건제가 해결하는 죄의 성격을 분명히 말해준다. 이 죄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한 행위들로서 십일조나 첫 새끼와 같이 성전에 바쳐진 성물을 자신이 유용하는 죄를 말한다. 그것은 여호와에 대한 믿음의 위반이다. 그러나 고의성이 없이 무심코 위반한 경우에 속건제를 바친다. 예컨대 레위기 22장 14절은 ‘사람이 부지 중 성물을 먹으면 그 성물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지니라’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 장에서 이어지는 15~16절은 고의로 성물을 먹는다면 중벌에 처할 것이라 경고한다.



한편 이미 성전에 바쳐진 성물(고르반)을 유용하거나 사취하는 경우도 성물 침해죄에 해당되므로 역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 뒤 같은 방식으로 죄를 씻어야 했다. 남의 재산을 갈취할 때도 궁극적으로 이 죄가 여호와에 대한 믿음의 위반이 되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고 서약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자는 원금에 1/5을 더하여 갚고 숫양 한 마리를 성소에 바쳐야 했다(레 5:15~16; 6:5).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정황들


우선 레위기 5장 15~16절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해 부지 중에 범죄했을 때 속건제를 바치도록 명시한다. 지정된 성소의 세겔로 값을 매겨 숫양을 가져오고 그 성물에 대해 원금의 1/5를 더한 보상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실수로 바치지 않았다면 위의 절차를 밟아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5장 17~19절은 만일 여호와의 계명을 어겼을 때 그에 따른 속건제 규정이다. 이 조건절의 문장은 4장의 속죄제에서 나타나는 금지 명령의 위반에 대한 문장과 동일하다. 거기서도 여호와의 명령을 어겼을 때라는 진술이 나타난다. 앞서 속죄제에서 말한대로 정확히는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명령을 어겼을 때로 해석되는 조건문이다. 결국 동일한 조건문에 대해 왜 여기서는 속건제가 요구되는지 혼동을 일으킨다. 학자들이 추론하는 바와 같이 아마도 속건제에서 여호와의 계명을 어긴 범죄는 단순한 도덕적 금지 명령이 아닌 성물의 침해와 관련된 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원금의 20%를 더하여 배상을 하라는 요구가 없다. 이 상황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어떤 사람이 무의식중에 성소의 어떤 비품을 손상시키거나 오염시켰다. 그러나 의심은 갈지라도 정확히 누가 그 성물을 침해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면서 속건제를 드린다. 그러나 범인이 불확실하므로 배상금의 요구는 뒤따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속건제의 숫양을 드림으로써 성소를 침해했을지도 모를 자신의 죄로부터 홀가분해진다. 19절은 이러한 배상이 요구되는 잘못들은 명백히 여호와께 대한 범죄라고 분명하게 진술한다.


여호와 앞에서의 서약이나 맹세를 파기하면서 일으킨 타인의 재산 침해도 ‘마알’로 규정된다. 범죄자는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는데(6:2), 이를테면 위의 제이콥처럼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여서 탈취한 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사실을 부인한다. 또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거나(속임수) 자신이 물건을 맡은 적이 없다고 발뺌하고(도둑질), 나아가 이웃에 모종의 압력을 가하여 강탈한다(착취). 나아가 물건을 주운 뒤 거짓으로 하나님께 맹세하여 시치미를 뗄 수 있다. 이러한 거짓과 사기질, 불의한 분실물 습득은 맹세가 수반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다. 이것은 칼을 든 강도짓이 아니지만, 교묘한 합법적 수단으로, 이웃으로부터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임금 착취나 임금 체불과 같은 범죄라 할 수 있다(예, 레 19:13). 범죄자는 그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되 원금에 20%를 더하여 배상금을 물어줘야 한다. 아마 죄가 드러나는 날, 즉 사건의 진상이 파악된 뒤 그런 배상 절차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범죄자는 성소에서 정한 값에 맞는 숫양을 성소에 가져가 속건제로 바쳐야 한다.


속건제 규정에 명시된 죄의 목록들 외에도 속건제의 다양한 사례들이 나타난다. 완치된 나병(정확히는 악성 피부병) 환자가 다시 진영에 입장하기 위해 거쳐야 할 복잡한 정결 과정(레 14장) 중에는 속건제의 어린 숫양을 드리는 절차가 있다. 무의식 중에 신성한 대상을 침해한 죄로 저주를 받아 나병이 옮았을지 모른다는 당대의 인식 때문에 속건제가 요구되었을지 모른다(예, 민 12장의 미리암의 나병과 대하 26장의 웃시야의 나병). 서약 기간 중에 사체와의 접촉으로 더럽혀진 나실인은 재서약을 위해 두 마리의 새로 번제와 속죄제를 바치고 이어서 속건제의 어린 숫양을 바쳐야 했다(민 6:7~21). 이미 약혼한 여자 노예와 결혼함으로써 결혼이라는 신성한 서약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때(민 19:20~22)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방 여자와 결혼 서약을 했을 때(에 10:29)도 속건제의 숫양이 요구되었다.


한편 앞서 말했듯이 아샴이 레위기의 속건제 규정에서 말하는 숫양의 속건제가 아닌 일반적인 배상(물)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속건제가 아닌 배상(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짐승의 피에 의한 배상뿐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손해 배상을 통틀어 아샴이라 부를 수 있다. 블레셋 족속은 법궤를 빼앗아 다곤 신전에 두는 성물 모독죄를 저질러 재앙을 만난 뒤 법궤를 이스라엘에 돌려줌과 동시에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의 배상 제물(속건제)을 바친다(삼상 6장). 의로운 종의 죽음(사 53:10) 역시 속건제(아샴)로 번역되어 있으나 이는 문자 그대로의 전문적 속건제가 아니라 그 종이 배상물로 바쳐진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넓게 보면 속죄제도 배상(아샴)의 제사다(레 5:6). 예전 한글 개역의 경우 레위기 5장의 속죄제에 대한 설명에서 갑자기 속건제가 나타나 혼동을 일으킨다.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레 5:6). 여기서 속건제는 ‘배상물을 드리되’로 해석해야 한다. 한글개역개정은 그것을 속죄제로 번역하여 억지로 조화시켰는데 엄밀히 말하면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의로운 종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목숨으로 대신 죄값을 지불한 희생양이다.


물질적 피해를 입힌 구체적 사례들의 해석


앞서 말한대로 여기서 여호와의 재산에 입힌 피해는 무심코 저지른 범죄로 규정된다(레 5:15). 그러나 이웃의 재산을 탐하는 행위(레 6:1~7)는 다분히 고의적이다. ‘속임수’ ‘도둑질’ ‘거짓말’ 등을 통해 남의 재산을 집어 삼키는 악랄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람의 사유 재산에 입힌 피해를 원금에 불과 1/5만을 더하여 배상하는 것은 출애굽기의 소나 양의 도둑질의 경우와 상충된다. 출애굽기에서 절도죄의 경우 원금의 4배 혹은 5배를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출 22:1). 양이나 염소를 한 마리 훔친 것이 발각되면 네 마리로 갚아주고 소 한 마리의 경우 소 다섯 마리로 갚아줘야 한다. 들통난 출애굽기의 도둑질은 4~5배 물어주고 속죄제나 속건제는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배상의 책임을 묻고 사건은 종결되는데, 무거운 죄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출애굽기의 배상법과 레위기의 속건제의 벌금은 모순되어 보이나 양자의 죄가 다르다.


앞서 말했다시피 레위기의 속건제 규정은 기본적으로 무심코 여호와의 성물을 침해한 죄를 처리한다(레 5:15). 그러나 고의적으로 성물을 취한 범죄자는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엄중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레 22:14~16). 이때 속건제의 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아마 죄인의 자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레위기 6장 1~7절도 마찬가지 상황으로 추정된다. 위의 요아킴의 친구 제이콥의 사례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이웃이 맡긴 물건을 훔치고 유용한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며 자신의 범죄를 부인한다. 하지만 속건제는 ‘참회’와 ‘죄책감’을 동반하는 제사이기 때문에 분명 그 범죄자는 범행이 지목되었을 때 처음에 부인을 하다 나중에 심경에 변화가 생겨 잘못을 인정하거나 자수했을 것이다. 이때 그는 원금의 1/5을 더해 물어주고 여호와의 이름을 맹세에 남용했다는 이유로 속건제를 드리는 것이다. 반면에 출애굽기 22장은 범죄자가 물증과 더불어 체포된 경우이다. 따라서 그 벌은 매우 무거워 자신의 커다란 재산상의 손실을 초래한다. 한편 어떤 학자는 속건제의 벌금 액수에 대해 회개를 권장하고 피해자의 재산을 되찾아주려는 의도가 담긴 법이라 설명한다. 즉 속건제 규정은 자수를 유도하기 위한 징벌 감면책이라는 것이다.


속건제의 숫양과 그 가치


속건제의 제물과 배상은 속죄제와 달리 신분의 따른 차이가 없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 동일한 원칙을 따랐다. 누구든 원금에 1/5을 더해 배상하는 한편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므로 속건제로 숫양을 바쳐야 했다. 이때 숫양은 반드시 성소의 은화(세겔)로 가치를 매긴 숫양이어야 했다(레 5:15). 레위기에 값이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랍비들은 최소 은화 2세겔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여러 학자들의 추정대로 후대의 관행에 따르면 염소가 없는 사람이 은화로 성전 축사(stockyard)에 있는 염소를 사서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왕하 12:5~17). 그러나 피를 반드시 신체의 오른쪽 끝에 발라야하는 나병 환자의 정결 의식이나(레 14:14, 25) 나실인의 재서약처럼(민 6:7~21) 특별히 어린 숫양(male lamb)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은전으로 바꿀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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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건제(贖愆祭) 레위기 5:14∼6:7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이나 이웃의 물건을 침해하거나 손해를 끼치고 잘못을 깨달았을 때, 허물을 씻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속죄제가 실수로 죄 지은 사람이 제물을 드리는데 반해, 속건제는 손해를 끼친 원금에 20%를 덧붙여 배상한다. 그래서 배상제나 보상제로도 부를 수 있다. 공동번역 성경은 '면죄제'로, 가톨릭 성경은 '보상제'로 번역한다.


먼저 하나님의 성물에 대한 죄는 부정한 상태에서 제물을 먹는 일(레 22:2~16)과 하나님께 속한 헌물이나 십일조(레 27장)를 가로채는 일이고, 그것은 야웨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로 여겨졌다. 사도행전 4~5장의 아니니아와 삽비라의 죄와 말라기 1장 7~8절의 제사장의 죄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속건제는 이웃의 물건을 침해한 때에도 드려야 하는데, 위탁물이나 전당물에 대한 부정, 도둑질, 임금 착취, 분실물 취득(6:1~3) 등의 경우이다. 속건제 규례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야웨의 성물을 함부로 다루는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확대해서 생각하면, 사람에게 잘못하는 행위를 하나님께 잘못하는 행위로 여기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전의 다른 면으로 여기는 것처럼, 사람에 대한 범죄가 하나님에 대한 죄와 같다고 여긴다. 성경은 종교적 죄와 사회적 범죄를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죄 짓는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원만할 수 없다. 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데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통찰을 보여준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피해 숨은 아담에게 "어디 있느냐?"(창 3:9)는 물음을,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아우가) 어디 있느냐?"(창 4:9)고 하나님이 똑같이 질문하신 데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과 가인에게 행하신 같은 질문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죄는 사람에 대한 죄임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의 물건을 침해하여 행하는 죄에 대하여 속건제를 드림으로써 해결하게 하는 은총을 보여주신다.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이고,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보상하는 원리가 중요하다고 속건제 규정은 가르친다.


속건제 규례를 통해 사람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는데, 사람이 물질에 대해 가지는 욕망을 폭로한다. 물질에 대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하나님의 성물을 가로채기도 하고, 사람의 물건을 훔치기도 한다. 돈에 눈이 멀어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기도 한다. 십계명의 열째 가르침은 이웃이 가진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출 20:17). 물건을 실제로 훔치기 이전에 남의 물건을 가지고 싶어 하는 탐심 자체를 죄로 규정한다. 신앙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여러 가지로 판별할 수 있지만, 재물에 대한 태도, 돈에서 자유로운가, 돈의 노예인가 혹은 하나님의 종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돈의 철학(1900년)'에서 돈이 자기 확장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도 일정한 돈에 만족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밝힌다. 돈이 마치 신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욕망을 절제하고 포기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모습이라고 가르친다. 돈과 권력을 포기하고 절제할 능력이 있을 때,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특별히 속건제물이 제사장에게 소득으로 돌아가는 것(레 7:6~10)은 제사장은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서 땅에서 나는 소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성별된 신앙인은 물질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절제할 필요가 있다.


속건제를 드리는 다른 경우가 레위기 5장과 6장 밖에도 나온다. 악성 피부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는 정결예식과(레 14:10~20) 나실 사람의 헌신예식에도 속건제를 드린다(민 6:12). 이것은 사람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중요한 재산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피부병에 걸린 것은 자기 몸에 손해를 끼친 것으로 이해한다. 나실 사람이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시체에 손을 대서 자기의 몸을 더럽히면 속건제를 드려야 했다. 자기 몸에 손해를 끼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의 몸이기 이전에 하나님에게 받은 거룩한 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몸을 정결하게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 성경은 영과 육의 이원론을 말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구현하는 일에 우리의 삶을 바쳐야 한다.


속건제 규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정의와 공의의 삶을 사는 것이 삶의 제사라는 신앙의 가르침을 준다. 또한 사회·경제적인 범죄를 신앙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통찰력이 들어 있다.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원금만 갚는 것이 아니라 피해 보상을 하는 점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소중히 여기는 삶의 자세를 알려준다. 특별히 교회 재정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 목회자와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거룩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준엄하게 말씀하신다. 예배는 하나님과 백성이 나누는 사귐이다. 문제는 백성의 삶이 죄와 부정에 오염되도록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데 있다. 속건제는 이런 상황을 바로 잡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죄와 부정함에 빠져 신음하는 백성이 속건제를 통해 거룩함을 다시 회복하기를 바라신다. 


 

3. 결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정해진 예배를 드리면 의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주일에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은 예배의 작은 부분이고 사실은 세상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화목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임을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으로 마칠까 합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5장 16절) 이 말씀이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이웃(세상사람들)에게 행한 바른 행실 때문에 그것을 본 이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영적 예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모형이고, 그림자이며, 예언이신 구약성경상의 5대 제사에 대해 공부하여 잘 알게 하여 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이 제사를 통하여 한 몸으로 모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보혈로 모든 구약제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을 알게 해주신 은혜 감사드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5대 제사와 3대 절기(2)

 

1. 4대 제사 방법

 

하나님께 드리는 3대 절기와 더불어 행하는 4대 제사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배우 볼 까 합니다.

 

가. 화제

제물을 불로 태워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입니다. 번제와 소제의 제사에서 쓰이는 방법입니다.

 

나. 거제

이 방법은 제물을 높이 쳐들어서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방법입니다.

 

다. 요제

제물을 위 아래로 흔들거나 앞뒤로 흔들어 하나님께 구분하여 드린다는 뜻을 가진 제사 방법입니다.

 

라. 전제

포도주를 제물에 쏟아 온전히 헌신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나타내는 제사방법입니다.

 

2. 제사 방법의 특징

 

율법에 의해 드리는 제사(예배)는 사람의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정해주신 것은 절기나 제사법이나 제물과 예물(헌금)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희생제사는 그 죄를 온전하게 담당해 주실 예수님께서 오셔야만 멈출 수가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희생제사가 사라지기 전까지 유대백성들은 무수히 많은 동물들을 희생시켜 제물로 바쳤습니다.

- 유월절에서는 상번제, 번제, 전제를 통하여 총 51마리의 짐승이 희생제물로 드려졌습니다.

- 칠칠절에는 번제와 속죄제로 소제, 전제로 13마리의 짐승이 희생되었습니다.

- 초막절에는 번제의 화제, 속죄제, 상번제, 소제, 전제를 통하여 215마리를 짐승이 희생되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초막절에서는 희생제물인 수송아지 열세마리를 준비하여 7일동안 1-2마리 씩 차례대로 죽여 나가다가 마직막 날 8일에는 수송아지 1마리와 흠 없는 어린양 7마리를 드리도록 하신 것은 마침내 구원을 성취시킨 예수님의 희생을 7일간의 사역을 보여주는 모형을 보여 주셨습니다.

 

3. 결론

 

태초에 정하신 구약, 신약의 복음이 마지막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성경을 통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케 하는 날에는 서원제나 낙헌제 외에 번제, 소제, 전제, 화목제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 서원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함

    낙헌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

 

하나님 아버지! 무한하신 당신의 구속사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성경말씀에 무지함을 용서하옵소서. 앞으로 성경말씀에 대해 더 알게하여 마귀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전신갑주를 입게 하여 주십시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대 절기

 

오늘은 구약의 출애굽기23장 14-17절 말씀에서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무교병의 절기(유월절).....맥추절(칠칠절).....수장절(초막절)을 지키라. ...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라며 애굽을 탈출한 유대백성에게 주신 율법을 통해서 무교병의 절기인 유월절, 맥추절인 칠칠절, 수장절인 초막절을 지키도록 명령하신 말씀 때문에 동물의 피를 뿌리는 희생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1. 유월절(레위기23장 5-8절)

 

구약성경의 절기는 모두 음력을 사용한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니라” (창1장 5절) 유대민족의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로 무교절의 시작이 되는 날이었으며, 이방문화와 풍속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 위해 유월절이 시작되는 그 달로 신년을 삼으라고 명령했습니다.

- 유월절은 유대백성을 노예생활에서 자유인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셨습니다. 레위기 23장5-8절에서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며, 화제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 유대백성이 애굽을 탈출할 때 장자들의 목숨을 살려주신 사건을 기념하는 유대인들의 큰 명절로 음력 1월 10일에 제물인 흠없는 1년된 어린양 숫컷을 준비하여 유월절이 되는 1월 14일 저녁 황혼 때에 그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서 행사가 시작됩니다. 이 날을 “여호와의 밤”으로 규정하였으며,(출12장 42절)

- 이 어린 양 숫컷을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유월절에 연이어서 1월 14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 무교병을 먹으며 무교절 행사를 하였습니다.

- 무교절에도 유대백성 누구나 누룩이 없는 무교병(=맛차)과 쓴 나물을 먹습니다.

- 누룩은 죄를 상징하며, 쓴 나물은 유대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의 고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 고난의 떡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라고 명령하신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는 유대백성을 통해 죄를 뜻하는 노예생활에서 죄가 없는 자유인으로 해방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보여주시기 위해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게 하셨던 것입니다.

- 특이한 것은 정기 1월 유월절에 참석못한 경우가 있으면 한 달 뒤인 2월 14일 해질 때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에는 긴박하게 애굽을 탈출하던 모습대로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긴박한 상황임을 보여주였습니다. 출애굽12장 11절 말씀.

- 신약성경에서는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성령강림절)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을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23장16절)

신명기 16장 9-12절에서는 칠칠절을 지키라,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 노비, 레위인, 객과 고아, 과부와 함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할지라......설명하고 있습니다.

보리가 익어서 수확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맥추절(초실절)은 유대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곡물을 수확 할 때에 제사법에 따라 첫 이삭 한단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면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 제사법은 오직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제사법을 따라야 하는데 농사를 짓고, 수확한 첫 이삭 한단을 먼저 제사장에 가져가서 그 단을 흔들어(요제)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 이 절기는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을 통해 택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제사이기도 합니다. 모든 제사법과 단 위에 바쳐지는 제물과 예물은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 절기에 드리는 제사로서는 ,

•요제: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로 세우심을 의미하고,

•소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 위해 예수님이 생명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제는 번제와 화목제와 함께 드리는 제사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자원제입니다.

•전제: 포도주 힌 사분의 일을 제물에 쏟아서 드리는 제사로 이는 온전히 헌신하는 예수님을 피 흘리심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 칠칠절인 3대 절기 중 유일하게 지정된 날짜가 없으며, 단지 ‘곡물이 익어 거둘 때’와 ‘안식인 이튿날’로 기준만 세워 놓은 것이 특이한 사항입니다. 즉 맥추절로부터 오십일 째 되는 날이 오순절인 것입니다.

- 칠칠절은 거룩하신 신약시대인 성령님이 오신 날이기도 합니다.

- 예수님과 구원받은 백성이 함께 결합하여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사임을 의미합니다.

- 맥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칠칠절이라고 부르는 오순절이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 날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있는 절기입니다.

- 기타 참고 절기

•7월 1일: 대 안식일, 나팔절, 7월 10일: 속죄일, 7월 15일: 초막절,

 

3. 초막절(=슈꼬트, 장막절, 수장절)

 

유대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초막절은 음력 7월 15일로 성경에서는 장막절이나 수장절 이라고도 부릅니다. 예레미야 23장 33-43절에서 “첫날에 안식하고, 제8일에도 안식하고,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 거두어 저장하며....토지의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여호와 전에 드릴찌니라.”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가족과 함께 초막에 거하면서 옛날 조상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전에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막을 치고 살았던 나그네 생활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이며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레위기 23장 33-43절에서 유대에서 난자는 7일 동안 다 초막에 거하라고 명령하셨으며, 초막절 규례를 지키라 하였습니다.

- 첫 열매의 종류로는 무화과, 포도, 올리브가 있습니다.

- 초막절 행사 중 저녁이 되면 일곱가지로 뻗쳐 있는 촛불을 성전에 켜놓고 햇불 춤을 추며, 여인들이 달빛 아래서 시편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합니다.

- 7일동안 ‘수카’라는 초막에 거하며 풍성한 결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 초막절 절기에 참여하는 것은 히브리서 13장 8절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라며 거짓 복음에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세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고 할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케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초막절은 마지막 때에 심판하시러 오시는 재림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즉 초막절 절기 제사 규례에는 초림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와 재림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 초막절이 증거되어야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께서 태초에 계획하신 모든 일들이 초막절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통해 보여주시는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 절기를 통해 모든 예언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은 곧 오시는 재림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은 끝이 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초막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천국에서 거룩한 대회(大會)로 모임을 가짐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완전하게 마치게 됨을 보여주는 아직 다 이뤄지지 않는 절기입니다.

 

4. 결론

 

초림을 통해서 복음을 성취하신 예수님과 만나게 되는 유월절을 시작으로 열방의 나라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기까지 깨닫도록 도우시는 성령님께서 오신 칠칠절(성령강림절)과 함께 초막절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복음의 완성을 기다리는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 살아온 행위대로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4장 23-31절과, 에스겔 36장 8-15절, 이사야 33장 20-21절에서 특히 에스겔 34장 2-4절은 말세에 사람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의 특성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 찐저 목자들이 양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찐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떼는 먹이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 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1. 속건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갈때는 어떻게 하는가. 속건제 부터 시작한다. 속건제는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을때 범죄했을때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 5배, 4배, 2배 배상이 있다. 죄질이 큰 소도둑은 5배를 갚아야 한다. 양도둑은 4배로 갚는다. 일반적인 손해는 2배를 갚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제사를 통해 회개하고 빨리 돌이키면 5분의 1만 더하면 된다. 만약 내가 1천불의 손해를 끼쳤거나,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물 1천불을 못드렸다면 1,200불을 드리면 된다. 제사를 통해서 할때면 5분의 1만 더하면 된다. 그러나 현대식으로 말하면 도둑질을 하다 들켜 형사처리가 되면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법적으로 문제를 삼았을때 5배까지 배상한다.


속건제 정신은 죄를 안짓게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회개의 문제는 회개는 잘못했다고 고백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고백하는 것은 돈이 안든다. 만약 한 개를 가지고 가면 두 개를 갚아야 한다면 다시는 안할것이다.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회개를 할대 내가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를 갚겠다고 했다. 삭개오는 큰도둑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사기를 쳤어도 조금 쳤으니 5배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는 회개를 그런식으로 전혀 물질적인 것과 관계없이 마음으로 표현하니 죄짓는 것에 담대해진다. 왜냐하면 단지 고백하면 되기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빚잔치'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자기재산은 뒤로 빼돌리고 파산하여 탕감받고 자기는 잘산다. 이렇게 해도 예수믿는 사람이 전혀 양심에 가책이 없다. 자기는 할 것을 다했다는 것이다. 성경의 원리는 그런것이 아니다. 사람마음속에 죄를 짓지 말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 회개인데 우리는 잘못가르친 것이다. 배상을 시키는 것이다. 배로 갚으라고 하면 안한다.


2. 속죄제


내가 몇배씩 갚아도 근본적으로 내 안에 해결이 안되는 문제가 있다. 생각의 범죄라든가, 해결할수 없는 마음의 큰죄를 짓는 것이라던지, 내가 배상을 아무리 해도 내가 가진 죄성은 해결이 안된다. 손해를 몇배로 갚아도 그런 죄성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물질로 해결안되는 문제를 하나님앞에 나가 도움을 청하는 것을 속죄제라고 한다.


"하나님 보세요. 저는 죄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고 감동을 안주시면, 내 마음을 바꾸어주지 않으시면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라는 자세로 제사하는 것이 속죄제이다. 그러나 보상할수 있고 배상할수 있는 것은 다 속건제이다. 소위 하나님이 오셔서 나를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속죄제이다. 여기까지가 의무제이다. 이것을 안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화목제, 소제, 번제는 자원제이다.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흠양하시는 제사로 받는 것은 이것들이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고, 다음에 성도들이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뜻대로 살려고 하면 위의 3가지 제사를 더 드려야 한다.


3. 화목제


하나님이 우리를 이땅에 제사장으로 보내셨다. 사람이 못된 짓을 했어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하셔서 구원받고 죄사함을 받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제사장이다. 그런데 제사장이 사람과 관계가 멀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자기 역할을 감당을 못한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면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다. 다른 제사는 다 이웃과 나눌것이 없는데 화목제만큼은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를 드린 사람이 먹고, 가족이 먹고, 심지어 같이 간 사람까지 먹을수 있다. 몫을 나누라는 것이다.


화목제는 감사제, 자원제, 서원제가 있다. 감사제는 보통 감사하여 감사헌금을 내는 개념이다. 은혜를 주셔서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너무 감사합니다 라는 것이다. 자원제는 감사해도 특별히 너무 감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특별히 더 하겠다는 것이다. 서원제는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3가지 화목제중 어떤 제사를 가장 좋아하시겠는가.


교인 가운데 평생 새벽기도 하기로 작정했다면 목사님이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것이 서원제이다. 특별한 관계를 맺으려면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감사할줄을 모르면 안된다. 특히 목사중에 그런 분들이 많다. 교인들이 목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면 고맙다고 피드백을 안한다. 목사들이 고맙다고 안하니 교인들이 시험이 든다. 고맙다는 말을 안하니 관계가 멀어진다.


하나님과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가 감사의 마음이 없으면 화목이 안된다. 이런 철학을 가지고 교회 감사헌금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런 합리적인 이유없이 무조건 내라고 하면 안낸다. 이민와서 뼈빠지게 번돈인데 어떻게 내겠는가. 여러분 교회 교인들은 감사헌금을 잘내는가?


4. 소제


화목제는 관계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 소제는 언제드리는가. 위로 올라갈수록 더 좋은 제사이다. 소제는 피가 아닌 기름이 있는 유일한 제사이다. 소제는 반드시 두가지 있어야 한다. 고운 가루가 있어야 하며, 기름이 있어야 한다. 가을철 수확을 할때 첫 소산을 가지고 소제를 드린다. 문제는 결실을 얻고 바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곡식을 충분히 말려서 갈아야 고운 가루가 되는데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갈아야 하니 고운 가루를 만들수 없다. 그래서 급조해서 하는 것이 볶는 것이다. 볶으면 급조는 되지만, 햇빛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말리는 것보다 못하다. 그러다보니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소제로 드릴수 있지만 향기로운 제물로 드릴수 없다는 말은 정상적인 제사는 아니기에 받기는 하지만 아주 기분좋게 받는 제사는 아니라는 개념이다.


하나님께 제대로 된 소제를 드릴려면 충분히 말려서 여러번 갈아서 만든 고운 가루로 드려야 한다. 고운 가루의 개념은 바로 우리의 인격이다. 성품이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광고가 있다. 고운 가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도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가루로 만드시는데, 고운 가루의 특성은 어디에 가도 소리가 안난다. 시끄럽고 싸우는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광야는 안끝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갈아 붙이기 위해서 맷돌을 여러번 돌리신다. 목사인데도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여러가지 어려운 경우가 있다. 가루를 좀 세밀하게 갈라는 뜻이다. 목사가 예배드리다가 성질내고, 교인이 힘들게 한다고 나가라 하면 되겠는가. 끝까지 목회자가 참아야 한다. 빨리 광야를 극복하는 비결은 빨리 갈아지는 것이다. 갈아지면 소리나지 않고 조용하게 성품의 변화를 일으킨다.


고운 가루를 갈았을때 기름을 섞는다. 안에다 기름을 반죽하고 바깥에도 기름을 섞는다. 내 안의 저 깊은 곳 까지 기름이 들어간다. 또 바깥에도 기름을 붓는다. 기름을 이중으로 친다. 안밖 이중으로 기름을 친다. 그런데 소위 성령운동이나 은사운동 하는 분들의 특징은 밖에는 기름부음이 있는데 안에는 기름부음이 부족하다. 속에 기름이 없다. 대학다니면서 호떡 장사를 했는데 반죽이 가장 힘들다. 반죽이 제대로 안되면 안익는다.


왜 우리 인생에 고난이 많은가. 반죽이 되어야 우리가 쓸모가 있는데 설교는 기가막히게 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나면 성질이 나쁘다. 그 쪽 반죽이 안된것이다. 그러면 성도들이 다 떨어진다. 앞에서는 잘하는데 뒤쪽에서는 이상한 짓을 한다. 그 부분은 반죽이 안된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가운데 혹은 목회자가운데 성령님이 들어가 완전히 적셔야 하는데 반죽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 왜 반죽이 잘안되는가. 그 이유는 가루가 곱게 갈아지지 않아 기름과 섞이지가 않는 것이다.


성령운동과 은사주의로 접근하는 분들은 내면에 기름부음이 없다. 반대로 말씀중심과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안에는 기름부음이 있지만 밖에서 기름부음이 없다. 사회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드라이하다. 자기의 힘으로 하려고 하고, 이성의 힘으로 하려고 하고, 설득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그것이 되겠는가. 본인은 열심히 하는데 성과가 없다.


기름부음이 밖에도 있어야 하고 안에도 있어야 한다. 양쪽으로 있어야 한다. 한국교계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분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는 이야기를 못보았다. 그 이유는 기름부음이 안에는 있는데 겉에는 없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보니 두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분이 참 드물다. 아프리카에서 사역했던 앤드류 머리라는 분은 두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 그분 책은 다 읽어 보았을 것이다. 그분은 은혜로운 말씀만 아니라 삶을 통해 파워풀하게 그것들이 드러난다. 그리고는 좋은 모델을 찾기가 참 힘들다.


성경적인 모델은 소제는 두가지가 다 있다. 기름부음은 안밖에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성품의 부서짐이 있어야 한다. 광야의 영성이라고 한다. 가루가 되고 그 가루 안밖으로 기름을 쳐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제의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 깊은 프로세스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평생을 소재를 드리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


5. 번제


번제는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내장도 씻어서 드리고, 지저분 한 것을 다 버리고 각 부위를 각을 뜨서 드리고, 최상품의 일등급의 번제는 가죽까지 드린다. 수치 모멸 명예까지 다 내어 드리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사건이후에 노아는 무슨 제사를 드렸는가. 번제를 드렸다. 그때 하나님이 무지개 언약을 주신다. 모세와 아론이 성막 건축을 완성하고 하나님에게 나아갔을때 번제를 드렸다. 저주의 에발산에 제단을 쌓은 이유는 저주가 임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코앞에 왔을때라도 포기하지 않고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다. 번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고의 제사이다.


교인들에게 예배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무엇부터 시켜야 하는가. 속건제이다. 그런데 회개기도를 성경적으로 본문에 따라 가르치지 않고 우리의 상식에 근거해 가르쳤기에 회개기도를 많이하고 그렇게 많이 예배를 드려도 사람들이 안변한다. 목사가 자기식으로 가르쳤고 성경대로 안가르쳤기에 변화가 안되는 것은 당연하다. 교회부흥도 있고 많은 사람이 왔다갔지만 근본적인 인격변화가 없다.


하나님은 "나는 이런 제사를 원한다, 이렇게 너희가 제사를 드리면 죄를 용서하고 심판을 면해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하나님이 이런 제사라고 하는 기준이 없어지고 우리가 원하는 제사로 바꾸어 버렸다. 나는 열심으로 드렸는데 하나님이 모른다고 하신다.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가 어디에 있는가.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하는데 자기 식이다. 평생을 헌신했다고 하는데 보니 자기식으로 헌신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헌신이 얼마나 많은가. 기준이 있어야 한다. 오늘 이 시대에 성경을 보기는 한다. 그런데 성경대로 안하고 배워했던 대로 그리고 해왔던 방식대로 한다. 그러니 뭔가 일어나고 변화가 있는 것 같은데 5-10년 지나고 보니 변화가 없다. 당시에는 눈물 흘리고 너무 은혜롭고 좋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안변한다. 그 이유는 말씀이 들어가야 사람이 변화되는데 말씀이 안들어가고 목사의 생각과 철학이 들어가니 내 사람은 만들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못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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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는 엄숙히 진행되었지만 침묵이 흐르지는 않았다


흠 없는 수컷 짐승을 선호 … 신분의 차이는 물론 남녀의 차별도 없어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우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제사를 공부할 차례다. 앞서 말한 대로 제사의 종류는 다섯 가지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이중 소제는 곡식의 제사이고 나머지는 짐승의 제사다. 우리는 각 제사들을 공부하기 전에 성경의 제사의 몇 가지 특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짐승을 바치는 제사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특징을 갖는다. 당장 레위기 1:2~5의 번제 규정에 몇 가지 특징들이 확인된다.


1) 가축이어야 한다.

레위기 1장 2절는 모든 희생 제사의 서론적 진술이다. 여기서 명시되는 희생 제물의 첫 번째 원칙은 그것이 ‘가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글개역의 ‘소나 양’으로에서 ‘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쫀(tson)은 작은 가축인 양과 염소를 의미하므로 가축은 소, 양, 그리고 염소를 가리킨다. 가축의 요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요행이나 불로소득으로 얻은 것보다는 제사자 본인의 땀과 정성이 깃든 소득과 생산물을 제물로 바칠 때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산양을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의 사례처럼 예외는 있지만, 원칙은 자신의 노력의 산물인 가축이었다. 소제물의 경우도 자신이 직접 재배하고 기른 농산물이 제단에 오를 자격이 있었으며 자연에서 채취한 것은 배제되었다. 가난한 사람의 경우에는 기르던 비둘기를 바쳤는데, 다만 그마저 여의치 않은 형편이라면 야생 비둘기를 잡아 드릴 수 있었다.


2) 흠 없는 짐승이어야 한다.

레위기 1장 3절은 그 가축이 ‘흠 없는’ 가축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가축 중에서 가져오되 대충 골라오지 말고 흠이 없는 상품의 가축을 선별해서 가져오라는 명령이다. 짐승의 흠들의 목록은 레위기 22:19~25에 제시되는데, 몸에 문제가 있거나 병이 있는 가축은 배제되었다. 아마도 겉으론 흠이 없다 해도 너무 마른 짐승은 속병이 의심되어 제외되었을 것이다. 애써 키운 가축이라는 조건과 그것이 흠이 없어야 한다는 요구는 모두 정성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짐승을 키우는 사람들은 평소에 이미 어떤 녀석이 최상품의 물건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다. 바로 그것을 아깝다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갖다 바치는 것이 최고의 제사일 것이다. 흠 없는 짐승이 요구된 이유는 거룩하고 완전무결하신 하나님께 걸맞은 짐승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3) 수컷이 선호된다.

레위기 1장 3절은 번제물에만 해당되는데 ‘흠 없는 수컷’이라고 명시한다. 다시 말해 번제물은 모두 수컷이 요구된다. 다만 비둘기의 경우 암수 구분이 불필요했다. 아마 너무 작은 짐승이라 암수 판별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번제 외 다른 제사들에서도 수컷 우월성은 확인된다. 속죄제의 경우 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는 ‘수소,’ 족장은 ‘숫염소’를 바치고, 평민은 족장보다 낮은 등급인 ‘암명소나 암양’을 드린다. 속건제에서는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죄인이 ‘숫양’을 바친다. 수컷 우월성은 특히 속죄제에서 평민은 암염소, 족장은 숫염소를 바쳐야 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다만 대부분의 고기를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던 잔치의 제사인 화목제의 경우 암수의 구별 없이 원하는 대로 바칠 수 있었다(레 3:1). 그렇다면 수컷을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당시 수컷이 더 비쌌다거나(Wenham), 수컷이 종자 가축으로서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근거가 빈약하다. 종자 가축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예나 지금이나 가축의 시장 가격은 수컷보다 암컷이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물로서는 수컷이 암컷보다 우위에 있는 이유는 제사에서는 시장 가치가 아닌 제의적 가치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수컷 선호는 수컷의 존재론적 가치와 대표성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이스라엘은 가부장적 중동 문화의 영향권에 속했다. 하나님께서는 문화적·역사적·지리적 한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약의 율법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제의 체계에서는 시장 가치가 아닌 율법에서 정한 제의적 가치에 따라 수컷이 우월하게 여겨졌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본질과 정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수컷은 본질을 알리기 위한 일종의 틀에 불과하다. 본질은 더 나은 것, 최고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현대적 관점에서 수컷이 제물로서 우월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여 구약의 성차별적 경향을 따지고 들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흠 없는 짐승을 선택해야 했다. 자신이 기른 짐승 중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일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신앙의 표현이었다.

4) 짐승의 등급이 나뉘었다.

짐승은 크기에 따라 소, 염소/양, 그리고 비둘기의 세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의 신분과 조건에 따라 짐승의 등급과 서열이 결정되었다. 번제나 화목제의 경우 경제적 능력에 따라 짐승의 크기가 달라졌을 것이며, 속죄제의 경우에는 사회적 지위가 기준이 되었다.


5) 짐승의 머리에 안수한다.

레위기 1장 4절은 ‘그는 번제물에 안수할지니’라고 명령한다. 이후 모든 희생 짐승들에 이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기서 ‘그’는 제물을 바치는 제사자를 의미한다. 제사자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레위기 1~5장의 제사 규정에 ‘손’(히. yad)이 단수로 쓰였다는 점을 들어 이를 한 손으로 간주하면서 아사셀 염소 위에 시행된 두 손(레 16:21)과 구별 짓는다. 그들에 의하면 한 손으로 안수하느냐 두 손으로 안수하느냐에 따라 안수의 내재적 기능은 물론 그 효과도 달라진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한 손이든 두 손이든 안수의 목적에 따라 안수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 우리는 나중에 안수 문제를 다시 살펴볼 것이다. 특히 속죄제/속건제에서는 안수의 기능이 중요한 쟁점이다.


6) 피는 제단에 처리한다.

레위기 1장 5절은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라고 진술한다. 여기서 ‘그’는 안수와 마찬가지로 제사를 바치는 사람, 즉 제사자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이 도살을 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제사장은 자신의 제사와 더불어 공적 제사에서 안수와 도살을 직접 집행할 뿐이다. 제사장은 양푼에 받은 짐승의 피를 처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안수와 도살 모두 제사자가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만일 제사자가 심약하거나 신체적 문제로 도살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제 삼자가 대신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제단에서 피를 처리하는 방식은 네 가지가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속죄제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7) 제물에서 나온 모든 기름은 하나님께 바쳤다.

피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하고 ‘모든 기름은 야웨의 것’(레 3:16)이기에 인간은 피와 기름 중 어느 것 하나 먹을 수 없었다(레 3:16~17). 따라서 희생 짐승의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 하나님께 드렸다. 번제에서는 모든 것을 태워 하나님께 바쳤지만, 속죄제/속건제와 화목제에서는 사람이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모든 제사에서 동물의 내장의 기름 부위는 반드시 제단에 바쳐야 했다. 내장의 기름 부위란 내장을 덮고 있거나 내장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 간엽 및 콩팥을 말하며(레 3:9~10; 4:8~9), 양의 경우 기름진 꼬리를 포함했다(레 3:9). 제의 법안에서는 종종 이것들이 통틀어 ‘기름’이라 표현된다(레 4:19, 26, 31, 35). 기름은 왜 항상 하나님께 바쳐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화목제를 다룰 때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8) 고기의 처리방식은 매우 다양했다.

번제의 경우 모든 고기를 제단에 태웠다. 그러나 속죄제/속건제, 그리고 화목제에서는 기름과 일부 내장만을 제단에 바치고 살코기는 인간이 먹었다. 속죄제의 경우 중대한 제사에서는 기름을 제외한 부위를 진 밖에서 태웠으나(태우는 속죄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제사에서는 제사장이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먹는 속죄제). 속건제를 드릴 때는 숫양을 바쳤는데 이때도 기름을 제외한 고기는 언제나 제사장에게 돌아갔다. 반면 화목제의 짐승은 제사장에게 일부를 할당하고 거의 대부분은 제사자가 가져가 가족과 친족,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9) 제사 중에는 침묵하지 않았다.

제사는 엄숙히 진행되었지만 그러나 침묵이 흐르지는 않았다. 아마도 출산과 병으로부터 회복되었을 때는 감사의 고백과 찬양이, 죄나 부정결의 문제로 제사를 드릴 때는 죄의 고백과 자신의 부정함에 대한 설명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제사를 다 마친 뒤에는 제사장의 축복의 선언과 죄사함이나 정결함의 선언이 뒤따랐을 것이다.


10) 제사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었다.

모든 제사는 신분과 빈부의 차이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남녀의 차별도 없었다. 남녀평등의 원칙을 따라 여성도 언제든 제사를 바칠 수 있었다. 다만 가정에서 바치는 번제나 화목제, 또한 절기에 의무적으로 성전에 올라와 바쳐야 하는 제사들은 가장인 남자가 주도했을 것이다. 한나의 사례에서 보듯이 여자라 해도 개인적인 감사와 헌신을 위해 번제나 화목제를 바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경우 죄인의 여성이라면 당연히 그녀가 제물을 들고 올라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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