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대 결혼
계대 결혼이란 고대 중근동 문화권 내에서 주로 행해지던 풍습으로서 죽은 형제에게 자손이 없을 경우 그 대를 이어주기 위해 죽은 자의 남은 형제가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이는 가계의 보존과 재산권을 중시하던 당신의 상황 속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이때 그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는 법적으로 죽은 형제의 자손이 되어, 그 죽은 자의 모든 권리를 이어받게 된다.
한편 이 계대 결혼의 풍습은 사회적으로 아주 강한 구속력을 갖는 것이었으며, 만약 남은 형제가 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심한 사회적 비난과 수치를 당해야만 했다. 이후 이 풍습은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하나의 율법으로 정착되어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예 / 창세기 38 : 6-11
유다는 큰 아들 엘이 죽어 둘째 아들 오난에게 큰 며느리 다말과 결혼하게 된다.
이 관습을 이행치 않은 오난은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로 보아 하나님께서도 이 관습을 허용하신 듯 하다.
* https://rialim.tistory.com/201
룻기에 소개된 계대결혼 및 기업 무르기(고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일곱 형제가 계대결혼에 따라 모두 한 아내를 맞이했는데 만일 부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부활 때에는 시집이나 장가를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부활 생명의 하나님" 이란 뜻입니다.
조화가 아주 멋있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조화가 잘 만들었어도 생화보다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조화와 같은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죽은 신앙이란 그 안에 부활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신앙이란 교회 안과 밖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면 별로 신앙이 없는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부활생명이 분명한 것을 말합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가사를 작사했던 "존 뉴톤" 목사님의 간증에서 천국에 올라갔을 때 세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이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있겠구나 하던 사람이 천국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사람은 천국에 없겠구나 하던 사람이 천국에 있다고 합니다.
셋째는 나와 같은 사람의 이름이 천국에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갖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아주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모든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열심도 없고 잘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모두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물론 직장에서 가정에서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때로는 당황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Sardis)란 "남은 물건" 이란 뜻입니다.
사데란 남은 물건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것은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수고했어요.
그러다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천국에서 여기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합니까?
이런 믿음이 죽은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는 믿음이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전도서에 보면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전 9:4).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서 생기가 넘치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생화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
죽은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은 제한된 세상이지만 저 하나님 나라는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거든요.
본문에서 겉으로 볼 때는 산 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 내면은 죽은 자인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인들이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고수하고자 하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엣세네파들 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거부하고 동굴 속에 들어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수도사같이 사는 은둔주의자들이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입니다.
모세오경을 믿으면서도 세속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논리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권과 결탁해서 종교정치를 일삼았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들은 종교 귀족들이요, 기득권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곳, 현실이 좋았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과 사후 세계를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담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면 부활도, 천사도, 내세도, 심판도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 -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실제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셨습니다.
이 땅의 삶보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예수님은 분명히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9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세상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해서 지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서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활을 부정하고 내세가 없다고 할 것인가?
며칠동안 고민 끝에 한 가지 기발한 스토리를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당시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형이 결혼했는데 자식이 없이 죽으면 가문을 보존하고, 과부된 여자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사는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분의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런 일이 한 가정에서 7형제 사이에 계속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장남이 결혼했는데, 신혼여행갔다 오다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둘째가 형수와 결혼했는데 신혼여행갔다가 쓰나미를 만나 죽었습니다.
셋째가 형수와 결혼했는데 자동차 급발진사고로 죽고,
넷째는 가족 소풍 중에 급류에 휘말려서 죽고,
다섯째는 회 먹다가 비브리오 패혈증으로 죽고,
여섯째는 놀이공원 갔다가 감전사고로 죽고,
일곱째는 등산갔다가 발을 헛딛어 죽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7형제가 다 죽고 여자만 남았는데 나중에 부활하면 누가 여자의 남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 할 때 한 여자를 두고 일곱 형제가 싸우게 되니 차라리 부활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치고는 너무나 수준이 낮고 유치합니다.
왜 남자만 연달아 죽고 여자는 죽지 않습니까?
이 여자는 남편 잡아 먹는 귀신이 붙었습니까?
소위 당대를 대표하는 고매한 신학자들이 겨우 이 정도의 말 밖에 못 합니까?
지금도 영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부활과 영생, 내세와 심판을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별의 별 이상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나와서 반박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세상에 불행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세상이 이처럼 불공평하고 불쌍한 사람, 장애인들이 있는가?”
자꾸 세상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영적세계를 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자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문의 사두개인들처럼 주로 비극적인 스토리만 늘어 놓습니다.
브라질 대통령이었던 룰라에 대해서 알고 큰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오지에서 8형제중 7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 티셔츠 하나만 입고, 닭장차 같은 트럭에 실려 13일 만에 상파울루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일곱 살 때 거리를 떠돌며 땅콩과 오렌지를 파는 거리의 소년이요, 구두닦이였습니다.
너무나 가난하여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열 네 살때 선반공으로 취직했습니다.
열 여덟살 때 선반기계에 손가락 하나가 잘려 나가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한 때 그는 직장 없는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다가 간염에 걸려 뱃속의 아이와 함께 죽었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얼마나 슬프고 운명적인 인생입니까?
그러나 그는 운명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습니다.
다시 공장에 들어가 일하다가 후에 금속노조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정계에 투신하여 세 번의 도전 끝에 2002년, 브라질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노동당 당수이기 때문에 빈민층을 대변하다가 국가경제가 아르헨티나처럼 파탄에 이를 것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빈민층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계층을 돌아보고, 교육에 힘을 썼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되, 자녀들이 학교에 많이 결석하면 지원을 보류하는 강경책을 썼습니다.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리더쉽으로 백성들을 아우르고,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교류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국민들의 교육열이 높아지고, 빈부격차가 줄자, 경제가 살아나서 그가 퇴임하던 2010년에는 브라질이 세계 8대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는 지지율이 67%였는데, 퇴임할 때는 87%나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대부분 취임할 때는 지지율이 7-80%에 가깝다가 퇴임할 때는 1-20%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룰라는 반대였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를 역대 세계 대통령 중에서 가장 성공한 대통령 중에 한 사람으로 꼽습니다.
그는 인생의 시련의 때마다 기도하였고, 교회 지도자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베풀어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똑같이 인생 스토리를 써가는데도 어떤 사람은 불행한 인생조건도 희망으로 바꾸는데, 사두개인들은 괜한 여자의 일생을 그다지도 슬프게 비비꽈서 비극으로 만들어 버린단 말입니까?
그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허무하고 염세적인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니까 그렇게 슬프고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들은 어짜피 세상은 이처럼 비극과 우연으로 가득차 있으니 이 땅에서 누릴만큼 누리자, 즐길만큼 즐기자,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그것이 그들의 인생철학이었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극히 현실주의자들이 되어서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신앙생활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대판 사두개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이나 하나님 나라의 상급, 그리고 마지막에 있을 심판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습니다.
“주님, 그저 자녀들 공부 잘하고, 남편 사업 잘 되고, 가족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부처님에게 비는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제목이 자기와 현실문제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 그런 것은 관심 없습니다.
정말 내 인생에 기적이 나타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고,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고, 척박한 오지를 개척하는 세계선교를 감당하고, 그래서 한 나라, 한 캠퍼스가 뒤집어지고.
그런 꿈과 기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이 땅에서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이라면, 하나님을 현실의 상자 속에 가두어 두는 현대판 사두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너희가 성경을 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전혀 차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시집도 장가도 아니가고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 후의 세계를 1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부활한 뒤에 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세계입니다.
성경에서 반드시 찾아야 할 신앙의 삼대 원칙은 무엇일까요?
창조 신앙
구원 신앙
부활 신앙.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절.
우리 하나님은 흙덩이에 불과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살아 있는 존재, 영의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신비 아닙니까?
창조의 신비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하였는데 모세오경 안에 부활에 대한 기사가 없기 때문에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오경 안에 분명히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로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다같이 26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모두 현재형을 사용하셨습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I am the God of Isaac, I am the God of Jacob.
‘I am’ 모두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400년이나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자신을 현재형으로 소개하신 것은 하나님이 현재,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도 지금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I am’ 입니다.
지금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모세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항상 ‘I am’ 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단절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항상 살아 계시고, 항상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항상 살아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 영이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육체도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담고 계시기 때문에, 그에게 붙어 있으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다 있었습니다.
로마서 4:17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며’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고자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창조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태가 말라서 전혀 임신할 가능성이 없었지만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미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활을 믿어야죠.
창세기 1:1절, 창조는 믿는데 부활은 못 믿는다.
그게 말이 됩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 못하시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반쪽으로 만드는 심각한 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어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좁은 자기 생각, 자신의 얄팍한 경험과 이성의 세계에 가두어 두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고, 크나큰 죄악입니다.
도덕적인 죄보다 더 큰 죄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자기 생각의 범주에 가두어 두고, 마음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제단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때 마르시온이라는 유명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신약의 하나님은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툭 하면 화를 잘 내시고, 심판하시고, 진멸하시는 무서운 하나님, 신경질적인 하나님, 진화가 덜 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신약의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 더 발전된 하나님, 업그레이드 되고 진화한 하나님,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잘 모르니까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두개인처럼 죽은 생각을 하고, 죽음의 한계에 갇혀 있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결탁되어서, 그 믿음이 살아 있고, 생명력이 충만하고, 절망하지 않고, 두려움을 모르는, 심지어는 죽음의 공포까지도 뛰어넘는 산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크게 오해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 처럼 반쪽짜리 신앙, 오해하는 신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을려면 제대로 믿어야죠.
사도바울을 생각할 때 죽은 자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항상 충만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사조같은 믿음의 용사, 그야말로 그는 산 자였습니다.
그가 그처럼 산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마음에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당하기 직전에 쓴 디모데후서 4:6-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의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생각할 때 조금도 죽음이 두렵거나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년의 스피릿으로 복음역사를 진두지휘하며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복음의 동역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었을 때 아들을 주셨다면 지금 나에게도 왜 지금 나에게도 소원있는 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근 가운데서도 이삭에게 100배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라면 왜 내 인생과 장래를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
사기군같은 야곱도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로 변화시키고 키우신 하나님이라면 왜 나를 변화시키셔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